[특별기고] '방화' 이대로 방치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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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처 예기치 못한 대형 지하철 방화사건으로 온 국민이 경악과 안타까움에 빠져 있다.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 방화 범죄는 독버섯처럼 사회 일각에서 몰래 자라났다. 연간 방화 범죄로 처리된 건수는 1960, 70년대에 3백여건에서 80년대 5백여건으로 늘었다가 급기야 90년을 전후해 1천건을 넘어섰다.

*** 사회불만·울분이 던진 범죄

더욱 놀라운 것은 얼마 전부터 방화범죄 건수가 살인사건을 앞질렀다는 점이다. 2001년의 경우 살인사건은 1천64건인 데 비해 방화범죄는 1천3백75건이나 일어났다. 우리보다 인구가 3배인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특히 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인구 10만명당 방화 건수는 50% 이상 늘었다. 사회 불만과 울분이 불길로 나타난 것이다.

방화는 여러 모습을 띠고 있다.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방화, 범죄 은폐를 목적으로 하는 방화, 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방화, 드물기는 하지만 방화광(firemania)에 의한 방화 등 대단히 다양하다.

특히 최근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큰 비율(30%)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대구 지하철 참사처럼 심신장애인 등에 의한 방화가 포함돼 있다. 사회가 복잡하고 불안해지면서 이들에 의한 범행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방화 범죄가 날로 흉포화하는데 우리 사회의 대책은 선진국과 비교해 걸음마 수준도 안된다. 아예 관심 대상에서 벗어난 '잊혀진 범죄'라고 할 수 있다. 소방기관 및 경찰에 방화 대처를 위한 전담기관이 전혀 없다. 관련 연구자도 손에 꼽을 정도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 체계적인 연구가 있었다는 소리도 아직 못들어봤다.

반면 선진국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방화범죄에 발빠르게 대응해 왔다.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그 통제 및 예방을 위해 여러 각도에서 노력을 기울여왔다. 전담 기구를 세우거나 체계적인 연구를 하고 사회적 인식을 고취하고자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 것이다. 그 결과 뛰는 방화범죄 건수를 잡을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 70년대 후반 방화범죄만을 전담하는 특수조직(Arson Task Forces)을 출범시켰다. 또 '화재방지 및 통제에 관한 법( Fire Prevention and Control Act)'을 만들어 관련 예산을 크게 늘렸다. 이를 통해 방화범죄의 발견 기술을 발전시키고 대(對) 국민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집중 지원하고 있다.

일본도 70년대 들어 매년 1천건 이상의 방화 범죄가 일어나자 86년 도쿄 소방청에 방화화재예방대책위원회를 설치해 행정.사회심리.교육 등 다양한 각도에서 조사 연구해 종합대책 등을 내놓은 바 있다.

유럽의 경우 85년과 89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유럽방화협의 총회를 열어 방화범의 심리적 동기 및 주요 목표 대상에 대한 분석, 효과적인 현장조사 기법 등 20여 가지의 대책을 마련했다.

*** 전담기구·연구소 설립 검토를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방화에 대한 정확한 통계와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조사 기술의 과학화도 이루어야 한다. 또 방화범죄의 위험성에 대한 공공의 인식을 확산시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도 보험금 등을 노린 지능적인 방화나 정신질환자 등에 의한 우발적 방화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를 억제하기 위해 관련 법규와 행정법규를 재검토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전문인력을 키우고 전담기구나 연구기관의 설립을 당장 검토해야 한다.

방화범죄에 대한 관심과 그 대책 마련을 소홀히 한다면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더 곪기 전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 지금부터 차근차근 대책을 세워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것은 더욱 나쁘다.

崔仁燮(한국형사정책硏 범죄동향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