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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일이 잘 풀리니 한편으론 두렵네요 행복이 뭔지 알게 된 거니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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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호 19면

1 문명진은 ‘불후의 명곡’ 쿨 편에서 아카펠라를 선보였다. 2 들국화 편 무대를 함께한 그룹 허니패밀리.

지난 4월 6일 저녁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낯선 이름이 올랐다. 다음날 오후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궁금해 하며 손가락을 눌렀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대체 문명진이 누구야?”라며.

무명에서 스타로 … KBS ‘불후의 명곡’의 문명진

문명진(36)은 10년 만에 처음 방송에 나온 가수였다. 이날 KBS-2TV 노래 경연 프로그램인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이하 불후)에 나와 해바라기의 ‘슬픔만은 아니겠죠’를 불렀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동영상은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진짜 노래 잘한다” “명품 보컬” “숨은 고수가 나타났다” 등의 극찬이 쏟아졌다. 이후 그는 프로그램의 대세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고정 출연자가 됐다.

중년층을 중심으로 팬카페까지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문명진이 누구야”라고 말한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과거 스토리 한두 개만 풀어도 금세 화제가 될 터인데 그는 오직 ‘불후’ 방송 하나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잠시 쉬겠단다. 15, 16일 첫 단독 콘서트를 앞두고서다. 그러니 문명진을 좀 더 알고 싶다면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다.

6일 서울 대흥동의 한 음악 연습실.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트레이드 마크가 된 스냅백 모자를 쓴 문명진은 콘서트 준비에 한창이었다. 구부정한 어깨나 노래할 때 저절로 눈을 감는 습관, 리듬을 타는 듯한 손짓까지 방송과 똑같았다. 뭣보다 슬픈 노래를 슬픈 음색으로 소화하는 ‘문명진표 음악’이 촉촉한 안개처럼 연습실을 감싸고 있었다.

이 희로애락이 담긴 음색은 오랜 무명 시절의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설움 같은 건 아니라고 했다. 되레 ‘음악이 취미’였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보컬 트레이너로 한 달에 150만원씩 벌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집하고 회사 말고 갈 데도 없고 생활비를 쓰고도 남았죠. 그러다 돈이 좀 모이면 디지털 싱글앨범 하나씩 내고 그랬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했죠.”
자신을 알아주는 소수의 팬들과 교감하면서 지내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간간이 허니패밀리·홀라당·크라운 등 동료 가수들 노래에 피처링을 했다.

처음부터 꿈이 소박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기도 송탄에서 DJ를 하던 그는 스물둘에 그룹 업타운의 멤버였던 정연준(‘하루하루’ 작곡자)의 눈에 들었다. 정씨는 오디션에서 그를 발견했고, 알고 지내던 음반사 대표에게 소개했다. 2001년 ‘상처’로 데뷔할 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웠다.

하지만 첫 앨범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출발이 됐다. 대형기획사가 주도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구조였다. 회사 대표는 집도 팔고 빚더미에 앉아야 했다. “내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구나 여러 번 느꼈어요. 노래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컸는데 말이죠.”

2004년 2집을 겨우 냈지만 역시 반응은 냉담했다. 아이돌 그룹이 대세였던 시절 라이브 무대가 있어도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쩌렁쩌렁한 기계 반주음에 춤으로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하는 10대들의 공연에 이어 그가 무대로 올라가면 분위기는 다운되기 일쑤였다. “목소리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게 제 노래인데 관객들은 너무 산만했어요. 절 보고 ‘빨리 내려가 줬으면’ 하는 눈빛을 보냈죠.” 그 시절 그는 밤에는 대리운전을 했다.

때마침 방송 출연을 기피하게 되는 일도 벌어졌다. 한 케이블 음악 방송에서 정연준과 함께 듀엣을 해달라는 제안이 왔다. 그런데 정씨가 개인 사정으로 펑크를 내자 PD는 그에게도 돌아가라고 했다. “제가 신인이니 의미가 없는 무대라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 일이 제겐 큰 상처였어요. 방송이 이런 거구나,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말자’라고 마음먹었죠.” 이후 소속사와 계약을 할 때도 ‘방송 출연 불가’를 내 걸었다.

지나친 자기 방어처럼 들렸지만 그는 이것을 ‘오랜 무명의 부작용’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좋은 조건으로 이야기하면 색안경을 낄 수밖에 없는 경험이 많았던 탓이었다.

“이런 적도 있었어요. 어떤 드라마 OST를 공짜로 해주면 다음 대작에 타이틀곡을 맡기겠다고 하더라고요. 엄청난 기회였으니까 승낙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대작은 이미 음악 계약이 다 끝난 상태였더라고요.” 떡밥을 주는 음악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음악만 하자고 마음먹은 건 그때 이후였다.

그러다 진짜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연말 ‘불후’에서 출연 섭외가 들어온 것. 당연히 거절을 했는데 같은 소속사에 있는 허니패밀리의 주라가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또 방송 나갔다가 얼마나 더 초라해질까’라는 생각과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있을까’라는 생각 사이에서 수없이 고민했다. 1주일이 지나고서야 마음을 굳혔다. “문명진 목소리를 좀 더 많은 사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주라의 얘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녹화에 나설 때까진 그러고도 넉 달이 걸렸다.

드디어 3월 녹화 당일.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다. 관객들은 모르는 얼굴을 보고 수군거렸고, 그는 1승도 하지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왔다. ‘역시 나라는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 ‘제작진한테 정말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방송 당일에는 아예 TV를 켜지도 않았다. 대신 친구와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미친 듯이 전화랑 문자가 오더라고요. 처음 나온 애라 관심 가져주는구나 했는데 다음날도 검색어 순위에 계속 있으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후 그는 넉 달간 ‘불후’ 녹화에만 매달렸다.

노래 한 곡을 위해 1주일을 연습했다. ‘군밤 타령’을 부르며 춤을 추고, ‘해변의 여인’에선 아카펠라에 도전하기도 했다. “마지막 녹화 날, 이젠 지옥탈출이구나 싶었는데 막상 마지막 소절을 부를 땐 눈물이 나더라고요.”

예능을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었겠다고 하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예능은 앞으로도 안 할 것 같아요. ‘불후’ 대기실에 있는 것만도 처음엔 벌 서는 것 같았거든요. 그나마 ‘불후’에 몇 번 나오고 나니까 좀 익숙해졌지 제가 예능 나가면 방송 망칠 거예요. 가수가 노래 잘하는 건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나머지 재능은 그야말로 선물이죠.”

이쯤에서 대놓고 묻고 싶었다. 왜 사람들이 문명진의 음악을 좋아하는 거냐고. 그는 정답 대신 희망을 피력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내 목소리로 똑같이 전달하는 것, 그게 제가 추구하는 음악이에요. 아마도 소울이 풍부한 흑인 음악을 많이 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세월이 제게 알려준 정답이죠. 연습이 아니라 정말 시간이 지나야 깨달을 수 있는 거죠. 30대가 될 때 너무 우울했어요. 20대를 무의미하게 보낸 게 후회가 돼서요. 하지만 막상 30대를 보내면서 깨달았죠. 20대에 몰랐던 음악이 새롭게 느껴지고 재발견됐어요.”

그래서 그는 40대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기대에서다. 그러면서 되레 자신이 ‘거품이 많은 가수’라고 했다. 40·크러쉬·자이언트처럼 대중에겐 낯설지만 자신보다 실력 있는 친구들이 훨씬 많은 데다 여태껏 음악에 제대로 빠져들었나 반성이 되기 때문이란다. 이제야말로 노력하지 않았던 10년을 채워야 할 때라고 했다.

흔히듣는 ‘R&B의 교본’이라는 말도 부담스러워 했다. “미국도 한 번 안 가봤는데 어떻게 흑인들의 전통 음악을 제대로 알겠어요. 그런데 자꾸 그러니까 ‘농촌 R&B’라고 그냥 농담처럼 얘기해요.”

다시 연습실로 돌아가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계획을 물으니 “현재에 충실할 뿐”이라면서도 이번 콘서트와 내달에 나올 싱글앨범 활동, 11월 전국 투어를 꼽았다. “제 인생이 이렇게 잘 풀린 적이 있었나 싶어요. 저의 해라고 해도 될 법한데 한 편으론 두려워요. 행복이 뭔지 이제 알게 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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