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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협의 통해 ‘조정시장경제’로 선회를 증세 앞서 징세 절차 합리성·투명성 지켜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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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호 14면

안재홍 1956년생.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뒤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주대 정치외교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아주대학교 세계학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 『복지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형성과 재편:서유럽강소복지국가』 등이 있다.

남재희 전 장관이 국민통합의 비책으로 빈부격차 축소와 교육·사회 안전망 확대를 들었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아보기 위해 안재흥(57ㆍ사진) 아주대 교수를 만났다. 안 교수는 스웨덴·덴마크·네덜란드 등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에 성공한 유럽 강소국들의 개혁 과정을 30년간 연구해 왔다. 그는 “유럽 강소국들은 국가가 노사협상과 기업 결정 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정당 연립으로 대타협을 이뤄 위기를 극복했다”며 “우리도 이 같은 ‘조정시장경제체제’를 통해 보수가 복지를, 진보가 성장을 추구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유럽 강소국 사회통합 연구해온 안재흥 아주대 교수

-유럽 강소국들의 사회통합을 30년간 연구해 왔는데.
“1983년 스웨덴을 시작으로 유럽 복지국가들을 비교 연구했다. 이들 국가는 70~80년대 ‘복지병’ 위기를 겪다가 90년대 노·사·정 협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복지국가의 성패엔 정치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걸 발견하고 유럽 각국의 정치를 비교 연구했다.”

-그런 연구에 비춰볼 때 우리 정부는 어떻게 경제를 운용해야 하나.
“수출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는 개혁의 모멘텀이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대항하면서 탄생한다. 이를 ‘공공 악재’라 한다. 우리나라는 97년 외환위기로 김대중정부가 처음 복지제도를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을 억제하고 그 결과 기업이 성장하면 국가가 (노동자에게) 보완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돼야 한다. 미국처럼 내수시장이 큰 나라와 수출주도형 국가는 위기 극복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보육·교육 개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은 제한돼 있는데 수요는 과잉이다. 이로 인해 과외가 생기고 부모들 허리가 휜다. 1단계 개혁은 국립대 등록금을 무료화해 지방에 서울대급 국립대를 20개쯤 만드는 거다.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이 지방대 가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2단계는 범정부적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시스템을 확 뜯어 고치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
“정규직 근로자들이 임금을 낮춰 고용을 늘려야 한다. 스웨덴의 렌 마이드너(Rehn-Meidner) 모델을 참고할 만하다. 노조총연맹이 먼저 연대임금제를 주장해 고임금과 저임금의 간극을 좁혔다. 노동집약 산업인 섬유기업들은 노동자를 줄였다. 쏟아져 나온 실업자들을 국가가 3년간 훈련시켜 전기·기계·자동차 등 전략산업으로 이직시켰다. 이들 산업은 임금을 억제한 결과 이윤이 늘며 실업자들을 더 고용할 수 있었다. 이로써 스웨덴은 성장과 완전고용, 산업구조 재편이란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 60~70년대 국민총생산의 2%를 이 같은 노동정책에 지출한 덕분이다.”

-국가가 총수요를 늘려 경제를 살리는 케인지언 정책 대신 공급에 관여해 문제를 푼 것인가.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유럽 경제가 재건된 건 케인지언 정책 덕분이 아니다. 국가가 총수요 대신 공급에 개입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소비와 수출을 늘린 결과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과 비슷하다. 다만 한국은 노동억압적 정책을 쓴 반면 유럽은 노·사·정 대타협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일자리를 만든 게 다르다.”

-임금을 노동자 스스로 낮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유럽도 19세기 이래 노사 투쟁이 격렬했다. 1920년대 경제 공황으로 실업률이 70%까지 치솟자 ‘사회적 시각에서 임금이 결정돼야 한다’는 생각이 늘어났다. 네덜란드에서 노·사·정이 ‘임금은 독일과 벨기에보다 30% 낮아야 한다’고 합의하고 입법화까지 했다. 노사가 임금을 많이 올리면 국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다만 최근 경제가 살아나면서 생산성 증가분만큼은 임금을 올려도 괜찮다고 법을 바꿨다.”

-적정 임금 수준은 어떻게 정하나.
“임금을 이상적인 수준으로 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스웨덴은 수출을 주도하는 금속노조의 임금협상 결과에 따르고, 오스트리아는 국유기업인 철강업계의 임금협상 결과에 따라 정한다. 덴마크는 87년 사용자 연합과 노동조합 총연맹이 ‘임금은 경쟁국가보다 높지 않아야 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신자유주의에서 노·사·정 협의를 통한 조정시장경제로 선회해야 한다. 후기 발전주의 국가모델로 가야 한다. 노조의 대표성 확보가 중요하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통합하고, 싱크탱크를 국가가 만들어줘 노동자 스스로 임금정책을 설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했다. 이유는.
“경쟁과 배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로는 공동대응력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노·사·정 위원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 기구로 만드는 걸 검토해야 한다.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하는 유럽의 강소국들은 노·사·정 협의와 입법 정치가 잘 연계돼 있다. 또 비례대표 선거제를 실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70년대 이념 대립 시절엔 입법 마비 상태에 빠졌지만 90년대 좌·우파 정당들이 ‘정책 연합 협정’을 맺어 위기를 극복했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이슈는 노·사·정 협의에 먼저 맡긴 뒤 입법 과정을 진행해 갈등을 줄인 거다. 80년대 이래 주기적으로 사회협약을 체결해 온 아일랜드와 네덜란드가 대표적인 예다. 우리도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독일 수준으로 확대해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필요가 있다.”

-유럽 강소국들은 연금 고갈 문제를 어떻게 풀었나.
“이 문제에는 좌·우파 정당들의 입장이 일치했다. 연금 기여금은 늘리고 급여를 낮췄다. 또 은퇴 연령을 높이되 고령 은퇴자에겐 인센티브를 부여해 재정 고갈을 해결했다.”

-복지 자본주의로 가려면 재원 확대가 불가피한데.
“증세에 앞서 징세의 절차적 합리성과 투명성이 지켜져야 한다. 또 ‘증세된 만큼 나의 복지가 개선될 것’이란 믿음을 국민에게 주어야 한다.”

-서유럽 복지국가의 조세정책은 어떤가.
“기업과 자본에 대한 세율은 낮은 반면, 임금 징세 수준은 높다. 수출로 먹고사는 대외 의존형 경제에선 자본의 투자가 일자리 창출의 관건이라 보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기업 투자를 유도하는 수단으로 조세정책을 활용했다. 가속감가상각제를 이용해 기업이 사내 유보 자금을 재투자하도록 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의 보수는 무엇을 고쳐야 하나.
“유럽에서 보수당의 이념적 기원은 기독교다. 유럽의 기민당은 공동체가 개인의 위험을 돌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그 때문에 복지 관련 분야에서 사민당과 연대할 수 있었다. 한국의 보수도 시장 지상주의를 넘어 공동체를 배려하고 인본주의를 강조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는 무엇을 고쳐야 하나.
“진보는 인본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현실적 대안을 모색해야 생명력을 가진다. 적과 동지를 나누는 이분법에서 공존의 이념으로 선회해야 한다. 또 북한 인권문제에 명확한 입장을 천명해야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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