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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PQ17 선단「미스터리」|선원 153명·4개 사단용 군수품 수몰시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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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히틀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무렵인 1942년 7월 4일. 북극해의 해저에서 작전 중이던 영국잠수함「트라이던트」호는 전사상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명령을「런던」사령부로부터 받았다.
독일의 세계최강이라고 자랑하는 전함「티르피츠」가 소련으로 항해 중인 영국의 대 수송선단 PQF선단을 공격하러 가는 것을 보면서도『공격중지』의 수수께끼 같은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35척의 PQ17선단은 12척으로 줄어들었다.
손실의 명세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3천 3백 50대의 군용차량, 4백 30대의「탱크」, 2백 10대의 최신비행기, 그리고 4개 사단병력을 완전무장 시킬 수 있는 약 10만t의 군수물자가 고스란히 수장되었다. 게다가 1백 53명의 비 전투요원과 수부들이 희생된 것은 이 작전을 명령한「처칠」의 정치적 성망에도 상당한 먹칠을 한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이처럼 처참한 결과를 빚은 PQF의「미스터리」는「티르피츠」호 격침을 중지시킨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미·영 등 연합국의 해군전략 전문가들은 이 『무모한 작전』을 포기하도록 종용했었다. 그런데 이들의 의견을 무시한 것이 바로「처칠」수상이었다는 점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최근 영국의 해전 사가들은 당시의 연합국 측 비밀기록과 독일 측의 보고서를 종합, 이「미스터리」참극의 정확한 경과를 발표했다.
애초의 이 작전은「스탈린」의 요청으로 구상되었다. 당시 적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 바로「모스크바」외곽에서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한 자루의 소총이 아쉬웠던 때「루스벨트」는 대소 전략물자 원조를 위해 대량의 군수품을 영국에 옮겨놓고「처칠」에게 소련까지의 수송을 부탁했다.「처칠」은 이것을 남「아프리카」를 돌아「페르샤」만을 통해 소련 남부에 갖다 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스탈린」은 『그때까지 적군이 남아 있을 줄 아느냐』고 반박,「노르웨이」북단을 돌아 소련 북부로 오는 짧은 항로를 택하라고 고집했다.
당시「노르웨이」는 이미「나치」에 정복되어 2백 60여대의 독일 최신예기와 U 「보트」가 이 항로를 완전 봉쇄하고 있었으므로 대 수송선단이 무사히 항해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운」형편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양국가로서의 위신과 동맹국으로서의 의무는「처칠」에게 선택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6월 27일「발피욜드」항을 출발한 PQ17선단이「노르웨이」북부에 이르자 5월부터 시작된 북극의 긴 낮은 이들을 24시간「나치」기의 감시하에 있게 했다.
그러나 7월 4일 밤까지는 단 한대의 적기도 나타나지 않았고 U「보트」의 기습도 없었다. 「런던」교외의 지하 34m에 설치된 정보사령탑에는 「파운드」해군 참모총장이 직접 나와서 이들의 항해 보고를 듣고 있었다.
「파운드」제독과 막료 장군들은 이들의 운명이「나치」최강의 전함「티르피츠」호에 달렸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티르피츠」호의 움직임은「노르웨이」안의 정보원들로부터 시시각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7월 5일 상오 11시「티르피츠」호가「알텐피욜드」항을 떠나 PQ17선단을 향해 전진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오 9시. 영국의 잠수함「트라이던트」호로부터「티르피츠」호가 사정권 안에 있으며 호위함 마저 없으므로 공격즉시 격침할 수 있다는 보고 들어왔다.
그러나「파운드」는『공격중지』를 명령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 PQ17선단은 어차피 동맹국들에 성의를 보이기 위한 「정치적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파운드」제독은 PQ17 선단을 호송하던 호위전함들에 『U「보트」의 공격시에 도피하기 편하도록 분산할 것』을 명령했었다. 침몰된 23척의 배가 거의 징발된 상선이었고 1백 53명의 희생자가 모두 상선의 수부였던 것도「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선데이타임즈 독점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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