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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품 인생|나영균<이대 교수. 영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남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이따금 집에서 바느질을 할 때가 있다. 바느질이라야 저고리나 마고자 같은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나 여자들의 양복류를 만드는 것이다. 양복을 만드는 데에는 소소한 부속품들이 든다. 가령 소매나 깃을 달고 난 위에 솔기를 감싸는「바이어스테이프」라든지, 단추 대신에 간편하게 쓸 수 있는「지퍼」,「스커트」의 허리에 대는「인사이드·벨트」같은 것들이다. 또 아이들의 옷을 만들 때는 장식용으로 쓰이는「테이프」나 옷감 색에 맞는「리본」도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손쉬운 상점에서는 이런 것을 구할 수가 없다.「지퍼」같은 것은 구할 수가 있더라도 붙어있는 헝겊의 빚이 검은 빚 아니면 하얀빛 이어서 다른 빛깔의 옷일 때는 곤란하다.
물론 양장점에서 맞춰 입을 때는 채색 아니면 비슷한 색의 외국제「지퍼」를 달아 주지만 우리 같은 수요자는 그것을 어디서 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바느질 부속품은 틀림없이 일용품이겠건만 가까운 상점에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수요공급이란 주워들은 이론을 쳐들 것도 없이 이것은 가정에서 바느질이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다 장거리엘 나가보면 사실 여자들이 바느질 할 거리가 하나도 없게 생겨있다. 어른·아이의 의류 일체가, 심지어는 속바지·버선에 이르기까지 유행 따라 계속 따라 산더미 처럼 쌓여있다. 노인들이 감탄과 한탄이 섞인 말투로『요새 여자들이 편하긴 하겠더라』고 할만도 하다.
여기에 대조적인 것은 식품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식료의 공업화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장독 없애기 운동의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때를 같이해서 톱밥 섞인 고춧가루다, 비산이 섞인 소금이다, 더러운 아교로 끓인 간장이다, 빙초산으로 만든 식초다 하는 괴이한 물건들이 등장을 하고 뒤이어「롱갈리트」가 어떻고「사이클라메이트」가 어떻고「아미노」산이 어쨌다해서 장독을 없애기는커녕 지금까지 사먹던 초·식염·일본 간장·과자·사탕류까지 집에서 만드는 원시 복귀 현상이 일어날 판이 되다 시피 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인스턴트」고추장이니, 기성품 메주니, 통조림이니, 냉동식품이니 하는 품목들이 다시 조금씩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일 것이다. 식품공업이라는 것이 그 만큼 현대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고 또 의류 공업보다도 문명화에 있어서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노상 먹고사는 식품이 안전 공업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위생이나 도의나 일반민의 교양까지를 포함한 국가적인 문화 수준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불행히 일시적으로 좌절된 감이 있지만 머지 않아 우리 나라에서도 식품마저 의류처럼 공업화하지 않으면 못 견딜 때가 올 것이다. 또 전기기구도 설거지 기계며 세탁기며 소제기 같은 보다 실용적인 기구들이 퍼져 나가서 지금처럼 가정부 타령으로 아침저녁을 지새우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예상해 놓고 두 가지 걱정거리가 생겨난다. 하나는 편리한 생활에서 남아도는 시간을 여인들이 어떻게 처리하느냐 이다. 지금도 보이는 현상처럼 잡담·화투·극성·바가지·사치·농간에 그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시간과 정력을 써버린다면 생각은 다시 해봐야 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는 생활의 기성품화 혹은 평준화이다. 지금은 그래도 집집마다 장맛이 다르고 김치 맛이 다르고 음식 맛이 다르다. 그런데 장차는 그것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녀도 다 같아진다고 치자. 그러치 않아도 의복은 이미 어느 점도 같아졌다고 볼 수 있다. 아무 데를 보나 엇비슷한 차림의 아이·어른들이 넘쳐흐르고 있다.
이런 평준화의 물결 속에서 사람다운 생활의 맛과 개개인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고, 포근함과 윤기를 가져보려는 노력을 누구에게 해달라고 맡겨야 할 것인가, 눈이 돌아가게 바쁘지 않으면 기진 맥진해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일은 제쳐놓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채찍질하느라고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에게? 아니면 공부하느라고 변소 가고 밥 먹을 시간밖에 없다는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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