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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삼보앙가」섬의 정열 여족|김찬삼 기행기<필리핀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민다나오」섬의 서쪽 끝에 있는 「삼보앙가」는 날씨가 온화하고 공기가 맑으며 쪽빛을 띤 바닷물이 유독 아름다왔다. 더구나 남쪽 나라의 눈부신 햇빛이 비치니 저 유명한 「미뇽」의『그대는 아는가 남쪽나라』란 노래를 자아낼 만큼 남국적인 정감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이 항구 도시에서는 「마닐라」의 명물이라 할 저녁놀 못지 않게 아름다운 「바다 위의 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머무르는 동안은 놀이 뜨긴 했으나 저 금계의 황금빛 깃처럼 화려하지 못하여 바다까지 온통 놀빛으로 물드는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다. 이 자연의 조명이라 할 놀이 비치면 이 지상은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정말 멋진 무대가 될 테지만.
이렇듯 수려한 자연도 이 「삼보앙가」의 매력임엔 틀림없지만 그것보다는 「필리핀」의 이교도인 「이슬람」 교도로서의 「모로」족 여성들의 아름다움이 더욱 색다른 것이 아닐까 했다. 나는 그전 제2차 세계 여행 때 서남「아시아」의 「이슬람」여러 나라에서 배운 자그만 지식으로 이곳 「이슬람」사원을 찾아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이「모로」족의 몇몇 여성들을 사귈 수 있었는데 이 여성들은 어딘가 「카르멘」을 연상시킬 만큼 정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목걸이며 팔지 따위로 장식하였는데 회교적인 「모로」족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었다. 이 「모로」족 여성들은 「필리핀」의 일반 여성뿐만 아니라 미인의 나라 「스페인」 여성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그 까만 눈동자에서는 사랑의 불꽃이 튀기는 듯한 광채가 엿 보였다. 이들의 조상은 한때 해적이었다고 하는데 본디 율한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구나 종교보다도 굳센 「이슬람」교를 믿어오면서 그렇듯 강인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모로」족 여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정열형 여성으로서 내세울만한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이들 여성에게선 애정의 극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귄 여성 가운데의 한 여성은 가령 이국남성를 사랑하게 된다면 금방 그녀의 그 푸짐한 정열로 사랑의 포로로 만들 것만 같은 이상한 마력이 보였다. 「클레오파트라」처럼 요염한 사랑의 기교를 쓰지 않고도 말이다.
이것은 「아마추어」 세계 여성관상학자(?)인 필자의 눈으로 본 것이지만 분명 「모로」족 여성의 아름다움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이 같이 「모로」족의 여성이 정열의 상징이라면 남성들은 용맹과 반항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자그만 언동 하나 하나에도 이런 성격이 배어 있었다. 이것은 오랜 생활 환경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남성들은 선악의 양극을 지닌 듯 야수적일 만큼 강렬한 호투성을 지니는가 하면 상반적으로 신성에 가까운 종교성도 지니는 것이다. 이들은 깡그리 권력의지의 소유자들이다. 아니 반항의 귀신들이다. 「사르트르」는 『사람은 저항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을 했지만 이 말은 바로 이 「모로」족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신앙은 천국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교와 어떻게 싸워 이기느냐 하는데 더 큰 이념을 둔 것이 아닌가 하도록 특히 이들의 「이슬람」교는 그대로 『싸우는 종교』라는 인상을 풍겼다. 이 「모로」족은 비록 이 나라의 외딴 곳에 살긴 하지만 「필리핀」의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도 딴은 이들의 불굴의 「레지스탕스」 때문일 것이다.
「삼보앙가」에서 이번엔 이 나라 종단여행의 종착지인 남쪽 끝의 「다바오」로 갔다. 적도에 가까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옷은 온통 땀에 젖고 얼굴은 더욱 까맣게 됐다. 그리고 나의 길잡이인 지도는 해지고 찢어져서 누더기처럼 되었다. 그래서 덕지덕지 「스카치·테이프」로 붙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렇다할 위기를 당하지 않고 왔으니 다행이었다. 몹시 지치긴 했으나 이 「다바오」에 오자마자 이곳 명물인 「마닐라」 삼(마)의 농원을 찾았다. 이 삼은 「아바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 나라 삼 같은 식물이 아니고 꼭 「바나나」나무나 파초를 닮은 것이다. 삼 밭은 마치 무슨 맹수라도 나올 것 같은 「정글」의 인상이었다. 이 「마닐라」삼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윤이나고 내구력이 세며 특히 물 속에서도 썩지 않기 때문에 선박용「로프」로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삼은 심은지 1년 반이면 섬유로 만들어 쓸 수 있다고 하니 이 또한 매우 훌륭한 경제성을 띤 재배 물이다. 그러기에 이 나라에서는 이 「마닐라」삼의 수출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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