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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기록으로 더듬어 본|진성여왕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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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평소에 경남 일대의 고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안종석씨(양산「로터리·클럽」회장)는 작년말 진성여왕릉을 찾아낸 후 계속 고문헌으로 고증한 글을 본사에 기고해 왔다.
본지에 연재중인 소설「여왕」의 주인공인 진성여왕의 유적을 찾는 작업인 만큼 본사는 작가 최인욱씨와 함께 본격적인 조사단을 파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얼마전 각 신문에 보도된 진성왕릉 발견설에 대하여 그 진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앞으로 이 능에 대한 전문적 연구는 계속 되리라 믿지만 문제는 왕릉 그 자체보다도 그 왕릉을 둘러싼 전설과 기록이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필자의 발견경위와 소견의 일단을 여기 밝힌다.
먼저 진성왕릉설을 주장하는 필자는 현 양산군 물분면 어곡리 화룡골을 고지에 나오는「정산」이라고 당정한다. 그 이유는 그곳 주민들이 그곳을「늘뫼」라고 속칭하고 있으며「늘뫼」는 즉「누루뫼」(황산)의 와전이라고 확신하는 까닭이다.
대정15년만「경주고적안내」에 진성여왕의 능소는 경상남도 양산군 황산에 자리잡고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였으며 황산은 전기한 물금어곡 화룡꼴의 속칭「늘뫼」와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 우선 고문헌에서 진성왕릉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를 보면 <동 십이월 을사 횡어북군 익왈진성 장우황산>이라 하였으니 여왕이 을사 12월에 북궁에서 돌아갔으므로 호를 진성이라고 일하여 황산에다 장사하였다고 했다.『삼국유사』를 보면 <김씨 명만헌 즉정강왕지동모매야 왕지필 위홍각간추봉혜성대왕 정미립 이십년 정사손위우소자효공왕 십이월붕 화장 산골우 모량서악 일작미황산>이라 하였으니 정사 12월에 화장하여 모량부에다 산골했으나 일설에 의하면 황산에 묘를 정했다고 하고 있다.
다음으로『경주읍지』권2를 보면<동 십이월 여왕횡일진성 장황산>이라 되어있고 권4에는<진성왕릉 재황산 금 양산군 황산역>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또『경주김씨 준원록』(신라역년기)에도 <진성왕(김씨경문왕녀) 원년무신(당희종문덕원년)재위십년능재 양산군 황산리>라하고 있다.『삼국사기』를 보면 탈해왕과 기마왕 때에 각각 황산진강 즉 낙동강가에 가야와 싸운 기록이 있으므로 양산과 황산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또한 삼국유사의『모량』에 대해서도 양산에 모량벌이 있고 그 모량의 부자가 원효를 도와 내원사를 지은 고사가 있으니만큼 그것은 경주의 모량이라할 필요는 없다.
첫째 현양산군 일부지역중에 상북면 상삼리 일대를 상황산, 물금면 물금리 일대를 하황산이다고 부르고 있으매 이 사이가 모두 황산이라고 볼 수 있다.『양산군지』황산역조에<재황산강안 본도속역십일잉포노곡륜산위천덕천굴화 간곡아월소산휴산신명 승일인정덕경오혁승 치찰방(후지)재군서이십리(지보)함풍정사 이수환 이설우 군북이십리즉구지야>라 한것을 보브면『군서20리』는 지금의 물금이요,『군북20리』는 상북면 상금리인데 1857년에 수해로 상삼리로 옮겨으니 이곳이 곧 구지다.
둘째로 물금면 어곡리 화룡골을 그곳 주민들이「늘뫼」외에「능골」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능곡」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양산군고적 어곡소항을 보면『재보서유소성속호수질옥고위소시수죄인지지(지보)삽량고기전운재어곡이옥곡외우이객사외우이객사곡위증연어곡지하유소위량동자혹비읍호지동모자야전의가야』라 한 기록이 있다.「어곡」은지금의「어곡」과 통하고 [옥곡]은 어곡의(어곡)의 와전이 아닐까.「어곡」을 지금도「어실」이라고 통칭하고「어실」은 어실로도 해석된다.
지금 어곡리 화룡마을 부근에「옥터」「큰 대문터」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큰집의 주춧돌과 석축의 자취가 있다.
이상과 같이 고지나 현장의 여러관련성으로 볼 때 진성여왕의 능소는 양산군 황산 곧 지금의 양산군 물분면 어곡리 화룡골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유감된 일은 70∼80년전에 어떤 사람이 늘뫼에 입장한 사실이 있다는 말이다.
약 15년전에 동래지방의 모씨가 산주를 찾아와서 선묘가 바로 이것이라면서 사토를 한 것이 현재의 모양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수년전 원동면원리 거주의 심장섭씨가 본 바에 의하면 당시 호석난간에는 십이지신장상이 희미하게 나마 보였다 한다. 그래서 그의 족보를 열람한바 첫째 아무리 왕가의 종친이라 할지라도 정오품따위의 벼슬로서 지방민이「능골」이나「왕릉골」이라 할리 없고, 둘째 상석이 풍마우세로 인하여 자연석과 같다는 점, 셋째 입장주인은 250∼300년전의 인물로 족보의 초판과 재판에는 묘소재가 각각 다르고 합묘1기로 돼 있는데 유독 3판(1955년 발행)에는 임좌상하로 2기로한 점등 석연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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