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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17, 18번홀 천금 버디에 날아간 코리안슬램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북해의 바다에서 불어온 세인트앤드루스의 바람은 잔인했다. 첫 이틀 동안 바람이 불지 않자 대회장 안팎에서는 '물컹해진 올드 코스'라는 수근거림이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왔다. 그 얘기에 '올드 코스의 여신'이 뿔이 난 것일까. 잠잠하던 세인트앤드루스에 맹렬한 바람이 불었다. 초속 16m(시속 60km)의 강풍을 몰고와 3라운드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 바람은 마지막 날에도 초속 10m에 육박했다.

박인비(25·KB금융그룹)의 사상 첫 그랜드슬램도, 최나연(26·SK텔레콤)의 '코리안슬램'도 이 강풍에 나가 떨어졌다. 1930년 보비 존스(미국) 이후 83년만에 세계남녀 골프 사상 첫 그랜드슬램에 도전했던 박인비는 이미 3라운드에서 이븐파로 경기를 마치면서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또 못내 아쉬운 것은 '코리안슬램'의 불발이었다. 박인비가 이미 메이저 3연승을 이뤄 놓았기 때문에 단독선두를 질주하던 최나연이 막판 페이스를 지켜냈다면 한국선수의 4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새로운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꿈도 사라져버렸다.

5일 오전(한국시간)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열린 리코 브리티시 여자오픈 최종 4라운드. 7언더파 공동 3위로 출발했던 최나연은 이날 오히려 한 타를 잃는 바람에 최종합계 6언더파로 스테이시 루이스(28·미국·8언더파)에게 2타 차로 져 아쉬운 공동 준우승에 그쳤다. 막판 추격전에 가세했던 박희영(26·하나-외환은행)도 6언더파를 기록해 최나연과 함께 공동 준우승에 만족했다.

최나연은 12번 홀까지 9언더파로 3타 차 단독선두를 질주해 코리안슬램의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나 최나연은 '올드 코스의 본격적인 게임은 13번 홀(파4·418야드)부터 시작된다'는 이 홀에 이어서 14번 홀(파5)에서도 연속해 보기를 하는 바람에 승부가 뒤집히고 말았다. 결국 17번 홀(파4·455야드)에서 버디를 한 루이스에게 7언더파 공동선두를 내줬다. 이후 최나연은 루이스가 버디를 했던 지옥의 로드 홀인 17번 홀에서 3온 2퍼트로 또다시 보기(6언더파)를 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18번 홀에서 이글 샷이 터져야 연장전으로 승부를 몰고 갈 수 있었지만 버디 퍼팅마저 놓쳐 공동 준우승에 머물렀다.

올 시즌 우승이 없는 최나연은 이번 대회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하루 일찍 대회장에 도착해 연습에 집중했다. 스윙 코치는 물론 멘털 코치까지 대동했고, 스윙 코치 로빈 사임스(33)의 친구인 데이비드 존스(33·이상 북아일랜드)를 캐디로 고용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막판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사실 8언더파 단독 2위로 출발했던 루이스는 16번 홀까지 2타를 잃어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가장 어렵다는 17번 홀에서 156야드를 남겨놓고 5번 아이언으로 친 두 번째 샷이 핀에 가까이 붙으면서 천금같은 3m 버디를 잡아냈다. 또 마지막 18번 홀에서 7m 거리의 버디 퍼터를 극적으로 성공시켜 단독선두인 8언더파로 경기를 마쳤다. 올드 코스의 여신은 막판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두 홀 연속 버디로 멋진 역전승을 일궈낸 루이스를 최종 우승자로 점지했다.

박희영은 14번 홀(파5)에서 발목이 잡혔다. 2온을 노렸던 두 번째 샷이 그린으로부터 80야드 떨어진 '지옥(Hell) 벙커'에 갇히면서 보기를 했다. 250야드 지점의 러프에서 친 우드 샷이 화근이었다. 공이 벙커 턱밑에 떨어져 직접 그린을 노릴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 때문에 진행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공을 쳐냈고 다시 벙커에서 4번째 샷으로 온그린에 성공했지만 1퍼트로 막지 못했다. 다행히 16번 홀에서 버디를 해 6언더파로 공동 준우승을 차지했다.

박인비는 첫 홀 더블보기를 포함해 이날만 6타를 잃으면서 최종합계 6오버파로 공동 42위에 만족했다. 박인비는 경기를 마친 뒤 J골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모든 짐을 내려 놓아서 홀가분하다. 결과는 아쉽지만 모든 대회가 그렇듯 이번 대회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리고 그린 적응에 실패한 점을 패인으로 꼽았다.

박인비는 "빠른 그린을 좋아하는데 오늘 그린이 상당히 느렸던 것 같다. 빠른 그린에 유리한 가벼운 퍼트를 사용하는데 이번 무거운 그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게 한계가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9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캘린더 그랜드슬램에 다시 도전하는 박인비는 "이번 대회의 실패와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최창호 기자 ch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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