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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두고 온 자녀들도 한국서 유산 상속 길 열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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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 주민이 전쟁 때 헤어진 부친과 친자식 관계임을 인정해 달라며 국내 법원에 낸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북한에 사는 주민이라도 대한민국 법원에 소송을 낼 수 있고, 유산 상속도 요구할 수 있다는 첫 판례다.

 대법원 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북한 주민 윤모(61)씨 등 4명이 “남쪽으로 내려와 살다가 사망한 아버지의 친자식임을 인정해 달라”며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존재확인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원고들의 부친은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병원을 운영하면서 슬하에 2남4녀를 뒀다. 부친은 6·25전쟁이 터지자 큰딸만 데리고 월남했다. 이후 권모씨와 재혼해 2남2녀를 더 낳았다. 부친은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부동산 등 100억원대 재산을 모았고 1987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하지만 상속지분을 놓고 가족 간 분쟁이 벌어져 이후 20년간 상속등기가 미뤄졌다. 2008년에야 남쪽 가족들에게만 상속이 이뤄졌다. 그사이 큰딸 윤씨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 국적을 가진 선교사 서모씨를 통해 가족의 소재지를 파악했다. 큰딸 윤씨는 이를 바탕으로 북한에 남은 가족을 대신해 한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북한 주민이 남한 법정에 낸 첫 소송은 시작부터 화제가 됐다. 소송 제기 자격이 있는지, 승소 시 재산이 북한으로 넘어가는지 등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큰딸 윤씨가 소송을 내기 위해 북한 국가보위부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사는 동생들의 자필 위임장과 소송에 필요한 모발과 손톱 샘플을 채취하고 이 과정까지 동영상으로 담아온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소송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먼저 소송 제기 자격을 다투는 친생자관계 존재확인 소송은 서울가정법원에서 2010년 12월 원고승소로 1심 판결이 나왔다. 당시 재판부는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이고 북한과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지만 아직 상대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아 외국에 준하는 지역으로 봐야 한다”며 재판관할권과 준거법이 한국에 있음을 명시했다. 또 북한 보위부 도움으로 공증 없이 제출된 위임장과 손톱 샘플도 “본인이 낸 것이 분명한 만큼 공증은 필요 없다”고 밝혔다.

 북한 주민도 소송 제기 자격이 있다는 1심 판결이 나오자 유산 분할 소송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사건을 조정에 회부했다. 결국 양측은 법원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2011년 일부 부동산을 넘겨받는 선에서 합의하고 소송을 끝냈다.

 이렇게 되자 정부가 바빠졌다. 만약 승소한 북한 주민들이 재산을 가져가겠다고 나서면 이를 처리할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칫 이런 소송들이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법무부는 부랴부랴 ‘남북주민 사이 가족관계와 상속 등에 관한 특례법’을 입법예고했다. 2011년 말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북한 주민이 소송을 내고 상속지분을 요구할 수 있지만 승소 시 우리 법원이 관리인을 지정해 관리토록 규정했다. 이를 근거로 서울가정법원은 지난해 말 큰딸 윤씨가 아닌 중립적인 변호사를 재산 관리인으로 선임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날 “북한 주민이 남한에서 법률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첫 판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소송을 이끈 배금자 변호사는 “특례법상 북한 주민은 승소해도 탈북하거나 통일되기 전까지 재산을 쓸 수 없다”며 “상속권을 인정하면서 사용권을 묶어놓는 바람에 소송을 낼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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