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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유진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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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교육자라고 새상을 외면할수는 없으며 합헌적정권교체가이루어져야 할때라고 판단하여 야당을택한것입니다.』
헌법학자만을 생각게했던 현민 유진오씨가 정치에 발을들여놓을때(66년말). 정치외역에선 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변화와 정치참여에의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던것같다. 야당은 신익희 조병옥씨 같은 지도자를 50년대에 잃어버렸고, 63년선거에선 윤보선 대통령후보가 패배한데이어 야당전열이 민중·신한양당으로 갈려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는지 모른다.
67년 선거를 앞두고 제1야당(민중당)의 기수로「데뷰」한 현민은 대통령선겨에서 윤보선씨를 후보로 내세운 통합야당(신민당)을 떠맡아, 출발에서부터 고된 정치생활이었다.
60년대 후반의 야당을 영도해온 유박사는 그동안 정치의 이상과 현실의 거리속에 상심한것같다. 그래서 그의「리더쉽」은「교과서적」이라고불리기도했다.
그는『야당은 당수를 중심으로 뭉치고 정권은 정당사이를 왕래하는것』으로 믿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즘」과 「카리스마」적 지도상을 배격하는 유총재는 지도자가 되는 요건으로 식견 역량 양심을 내세웠다. 이러한 논리의 바탕에 서서 유총재는 수많은 파벌속에 「당내민주주의」를 제창했지만 당내파벌을 강력히「컨트롤」하지 못한것같다.
명총재가 겪은 첫시련은 「6·8」총선후의 국회등원문제였다.국회의원선거에서 예상외로 크게 패한 신민당은 그원인이 부정선거라고주장, 「6·8」 선거의 전면무효를 선언했고 이강경「무드」는국회등원거부사태를가져왔다.
신민당은 6개월후에야 여야협상끝에 선거관계법을 개정하고 부정선거지구의 당선자를 시정한다는 내용의합의협정서를 만듦으로써 등원명분을찾긴했지만 이약속의 주요부분은 끝내 불발탄이 되고말았다.
이때문에 등원거부사태를 일부에서는「오도된지도노선」이라고 비판했고 유총재는 합의의정서가 관철되지 않은데 책임을 지고 68년말에 의원직사퇴서를 국회에 냈었다.
사의서가 반려되기는 했지만 야당당수의 의원직사의서가 대여항변이나국민에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에서만나온게 아니라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로 당내에서도 당수를 철저히받들지않는 풍조가 간간일고있었기때문이다.
정치는 명당수가 생각하는것 보다냉혹할수밖에 없는것인지… 아니면 그지나친 냉혹이 야당의 병리였는지… 어째든『파벌이 없어지지 않으면 정계를 물러나겠다』고까지 말한적이있지만 그는 파벌해소를 이루지 못한채 그것을 큰짐으로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무엇보다도 큰 충격은 3선개헌. 7년1의 정권교체를 위해 그런대로 단일야당을 분열없이이끌어온 명총재에겐 그저지가 벅찼다.
명총재는 개헌론이 대두되자 『3선개헌은 헌정의 파괴』라고 주장하고지방유세를 통해 개헌반대를 호소했었다. 그러나 「9·14」 개헌통과를 불과 하루앞두고 전총재는「뇌동맥경련증」이란 신경질환으로 몸져 눕기에이르렀고 지난2일 요양을 의해 일본에 갔다.
학자당수로서 계보로 묶여있는 보수야당을 정책정당으로 전환시키려고애쓰던 유총재가 건강을 회복해서 이과업을얼마만큼해낼지는 헤아리기어렵다. 당내에는 한참 체질개혁론이 있어더욱 그러하다.<조남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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