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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국외-「나세르」와 중동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여호와」 와 「알라」신으로부터 시작된 유태인과 「아랍」인의 적대 감정은 무려 3천5백년간이나 계속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과거 20년 동안에만도 3차의 대전을 치러온 중동은 오히려 또다른 대회전의 가능성을 잉태한 채 불안한 70년대를 맞으려 한다.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싸우는 「아랍」 9개국의 총수 「게말·압델·나세르」 (51)야 말로 이 지역에 수많은 희노애락을 심어준 곡예사였다. 52년7월, 일개 중령에 지나지 않던 「나세르」가 「나기브」 장군을 등에 업고 무혈「쿠데타」에 성공, 주색에 곯아 있던 「파루크」왕을 쫓아내면서부터 중동의 기상도는 그의 손놀림대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에 뒤통수 맞고>
스스로 『나는 혁명가이지 정치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나세르」는 56년 「수에즈」 국유화 선언으로 비롯된 영·불군의 침공을 훌륭하게 막아내 정치가로서의 토대를 쉽게 구축해 놓았다.
『비동맹』이란 깃발 아래 『반식민. 반봉건, 범「아랍」 통일』을 부르짖던 그는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를 조심스럽게 왕래하던 중 67년6월5일 「이스라엘」로부터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불과 6일만에 「아랍」공은 전력의 80%를 잃은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 나름대로 『역사의 부름』을 받았다는 「나세르」의 「절대」에 가까운 「이미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일부 지식층에선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절대」 이미지 깎이고>
『통일된 「아프리카」 시민권』을 호언하던 이 『「나일」강의 호랑이』의 콧대를 더욱 꺾어 놓은 것은 그의 비동맹 정책의 쇠퇴였다.
냉전이 완화되고 월남 문제 해결에서 비동맹국들의 발언권이 소외되고 또 중립 외교의 대표 격인 「네루」 「벤·벨라」 「응크루마」 「수카르노」 등이 사라지자 「나세르」는 어쩔 수 없이 외톨이가 되고 만 것이다.

<부인은 세심한 내조도>
3남 2녀의 아버지인 「나세르」는 아무리 바빠도 자녀들의 재롱은 받아주는 인자한 가장이기도 하다.
부인 「타히아·카젤」 여사는 가정적이며 좀처럼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법이 없는데 「나세르」는 부인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
「나세르」가 「카이로」의 조간지 3개를 보면서 빵과 홍차로 아침식사를 할 때면 부인은 옆에서 식사를 거들어주되 남편이 손에서 신문을 놓기 전엔 일체 말을 걸지 않을 정도로 세심하게 남편을 보살펴 준다.
최근엔 그의 장녀가 육군 장교와 결혼하는 경사와 아들 하나가 「테러」를 당하는 흉사를 함께 겪기도 했다.

<꼭꼭 미제 담배만 피워>
꼭 미제 담배만을 하루에 5갑씩이나 피워대는 이 『「나일」강 조타수』는 소련 돈으로 건설중인 「아스완·댐」의 준공을 눈앞에 두고 벅찬 감격을 누르고 있다.
「피라밋」보다 17배나 더 큰 공사인 이 「아스완·댐」이 내년 중에 완공되면 「아랍」의 경제는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6일 전쟁이 「아랍」측에 준 타격은 너무나 컸었다.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전전의 전력을 회복할 만큼 「아랍」의 물적 손실은 엄청났다. 이보다 더 큰 사실은 패전의 책임으로 인해 「나세르」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소에 추파 던지지만…>
중동 각국을 회유하려는 「아이크·독트린」에 반발, 「아랍·내셔널리즘」을 외치면서 『「아랍」의 일체성』을 내세우던 그는 필연적으로 소련에 추파를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이집트」의 실력자 「사브리」 「이스마일」 등을 친소 「쿠데타」 혐의로 체포함으로써 소련과의 「허니문」은 깨지고 말았다. 「나세르」의 위치도 불안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중동 문제를 해결하려는 4개국 회담도 아무 성과가 없었고, 또 현상태의 동결을 원하는 「이스라엘」과 유동 상태를 노리는 「아랍」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이 지역의 먹구름은 좀처럼 가실 날이 없다. <김건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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