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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에르하르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그가 수상이 된다는 것은 내가 화가가 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야』, 50연대말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를 두고 한말이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잿더미에서 서독경제를 기적적으로 복흥시킨 「미스터·번형」에 대한 「아데나워」의 이런 평가는 거의 포언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워낙 『예언자적눈』을 가진 「아데나워」의 말이라 서독사람들도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나「거품 같은 고무사자」라는 변명이 붙을 만큼 호인인 「에르하르트」가 「아데나워」의 모욕적인 발언에 대꾸를 않고 있다가 63년 수상자리에 올랐을 때 「아데나워」의 희망적인 예언은 「역사적인 거것말」이 되고 말았다.
전범재판으로 유명한 「뉘른베르크」서 멀지 않은 「노르트퓌르트」에서 직물상의 아들로 출생한 「에르하르트」는 가업을 물려받아 직물상이될 운명이었으나 자신의 희망은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삼전하여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 65년 「바이에른」주경제상으로 관계에 발 들여놓은 것이 「라인」 강물을 더럽혀 놓은 「경제 복흥의 아버지』 가 되는 시발점이었다.
접시하나 사는데 5년, 양복 한벌 사는데 50년 걸린다는게 종전직후의 독일경제의 참상이었다. 48년 「에르하르트」는 미영점영지구의 통합경제평의회의장으로 「라이히스·마르크」를 「도이치·마르크」로 바꾸는 통화개혁에 성공했다. 「기적」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63연까지 14년간 연방경제상으로 있으면서 서독을 「경제저거인」으로 길러냈다. 그는 「사회시장경제」의 이론, 동독피난민의 노동력, 미국의 「마셜」원조, 한국동란의 생산자극 등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시가」애용에는 「처침」과 쌍병을 이룬다는 「에르하르트」가 지난 30년 동안 피운「시가」를 길이로 따지면 35㎞나 된마는데 「에르하르트」는 자욱한 「시가」의 자연속에서 「기적」의 청사진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옹켈· 루디」(루디아저씨)로 애칭되는 「에르하르트」는 서독의 「트레이드·마크」요, 집권당인 기민당의 상표였지만 수상으로서의 시종 불우하기만 했다. 「드골」과 함께 독불추축의 밀월을 즐기던 「아데나워」는 「에르하로트」의 친「앵글로색슨」적인 월향을 경계하여 당내실력자 「슈트라우스」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에르하르트」는 통률력이 없다는게 「아데나워」의 구실이었다.
「에르하르트」가 「아데나워」의 「박해」를 극복하고 63년 수상이 되고 보니 국내외정세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국제정치무대에 있어서의 서독의 위치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데 미영불같은 우방들은 독일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월남사태로 여념이 없고 「프랑스」는 독자노선의 궤도를 쾌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국내서는 「인플레」와 경기후퇴의 압박이 가해졌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기적」을 낳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65년의 총선거에 승리하여 수상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66년 세제개혁을 둘러싸고 자민당이 연정을 탈퇴함으로써 「에르하르트」는 3년만에 수상 자리를 내어놓고 「시가」를 문채「본」 교외「비너스」언덕의 사구로 은퇴하고 말았다.
경제상시절에 한국을 방문한바있는 그는 미국계투자회사 IOS가 제의한 회장자리를 뿌리치고 정계와 경제계의 대원노로 필요한 조언을 하면서 틈틈이 부인과 출가한 외딸·외손들과 함께 「베토벤」을 즐긴다. <김영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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