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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기업 힘 실어줄 '성실 실패제' 도입하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김기형 전 장관이 우리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 방법론을 듣기 위해 ‘성실 실패제’ 도입을 역설해온 오세정(60·사진) 기초과학연구원장을 만났다.

오 원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엔 실패한 벤처기업인이 재기할 수 있는 ‘벤처생태계’가 조성돼 있다”며 “한국도 벤처 창업가들이 실패해도 노력했다면 결과를 인정해주는 ‘성실 실패제’를 도입해야 창의적인 발상을 시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연구단장 50명에게 각각 100억여원씩 지원하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은 오 원장의 이런 철학에 따라 연구자들이 실패할 경우에도 사업의 연속성을 보장해주고 있다.

-과학기술이 가지는 의미는 뭔가.
“인류 발전의 큰 축은 기술과 의식이다. 사회 자체가 기술에 따라 바뀐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경제 시스템까지 바뀐 게 대표적인 예다.”

-현재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을 진단한다면.
“우리 기술이 세계적으로 뒤떨어지는 분야는 이젠 없다. 문제는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휴대전화나 반도체는 우리가 먼저 만든 게 아니고 잘 쫓아간 거다. 이젠 남이 못 하는 걸 해야 한다. 독일이 수많은 히든 챔피언(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중소 제조업체)을 보유한 이유는 이들 업체가 남보다 한발 앞서 있다는 점 때문이다.”

-역사상 중국은 종이와 나침반 등 첨단 기술을 선도했지만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일어났다.
“중국은 사회 시스템이 부족했다. 우리도 과학기술은 있지만 벤처·기술금융·시스템이 부족하다. 결국 리더십의 문제다.”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달 착륙 프로젝트’처럼 국가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란 얘긴가.
“케네디는 과학기술 투자에 대해 구체적인 비전을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도 케네디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국가는 민간이 하지 못하는 고위험 기술투자에 나서야 한다. 그 가운데 기초과학 투자가 가장 중요하다. 연구자들을 믿고 자율성을 줘야 최고가 나온다. 미국에선 기술투자 심사는 까다롭게 하지만 결과 보고서는 받지 않는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단기간에 세계적인 기업이 나온 이유가 그 때문인가.
“그렇다. 가능성 있는 기업을 세계적으로 띄우는 건 미국과 이스라엘이 특히 잘한다. 특히 실리콘밸리의 생태계가 잘돼 있다. 기술 개발자와 대기업을 연결해줘 대형 히트작으로 만들어내는 채널과 사람들이 많다. 그걸 우리 정부가 해줘야 한다.”

-김기형 전 장관은 우리도 실리콘밸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였던 재미동포 김종훈씨는 기술을 개발해 10억 달러(약 1조원)에 팔았다. 미국 대기업에서 김씨의 기술을 인정하고 산 것이다. 실리콘 밸리 원천 기술은 이처럼 젊은이들의 창업과 도전정신에서 나온다. 다국적 기업들도 자신들의 연구소 대신 벤처에서 나온 기술을 사는 게 효율적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중소기업이 중요하다. 젊은이들이 자꾸 대기업에만 가려 하니 역동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기술 거래나 가치 거래가 부족하고, 시장도 부족하다.”

-그런 문제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기술거래나 금융을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공계에 진학해서 창업할 경우 대기업 상무까지 올라가는 것보다 더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가 많이 나와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보기술(IT) 붐을 일으켜 젊은이들한테 가능성을 준 건 엄청난 조치였다.”

-대덕연구단지를 실리콘밸리처럼 만드는 국가 프로젝트가 필요한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프로젝트다. 대덕연구단지엔 국립연구소가 20개가 넘고 KAIST도 있다. 그런데도 산업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스탠퍼드식’ 해법을 제안한다. 스탠퍼드대는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이들이 학생들에게 경험담을 들려주게 한다. 이를 듣고 학생들은 창업에 도전한다. KAIST가 스탠퍼드 역할을 해줘야 한다.”

-증권시장에 벤처를 지원하는 ‘제3거래소’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럴 필요가 있다. 지금 신생기업이 코스닥에 등록하기가 너무 어렵다. 국가가 아니라 시장에서 고위험?고수익 투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엔 전자공학과에 우수한 인재가 몰려 IT 강국이 됐다.
“좋은 기술만 확보하면 1조원도 벌 수 있다는 풍토가 정착되면 이공계는 자연히 살아날 것이다. 또 법대와 의대의 제도적 기득권이 없어지면 이공계도 평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독일의 경우 드레스덴 대학이 산학협력을 시작한 뒤 과학기술이 많이 발달했는데.
“교수들이 인재를 키우지 않고 자신과 똑같은 사람만 양산하는 게 문제다. ‘논문은 이렇게 써라’고 다 지정해주는 식이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불가능하다’는 것만 가르친다. 학생들이 가능한 걸 얘기할 수 있는 채널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산업화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는 데는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기업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려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사용과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가 노벨상을 못 타는 이유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사람을 잘 지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구자들을 믿어준다. 실수를 하더라도, 결과가 안 나오더라도 성실한 자료가 있으면 믿어준다. 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결과가 나와야 한다. 교수들에겐 매년 논문을 몇 편씩 써야 한다고 강요한다. 그래서 우리는 R&D 성공률이 90%에 달하지만, 선진국은 40% 수준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누가 앞서 있는가. 이런 패러다임을 국가가 바꿀 때가 됐다.”

-신성장동력 전략이 나라마다 거의 같다. 우리가 살길은 뭔가.
“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바이오 산업이 중요해졌다. 미국이 여기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바이오 분야에서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건 우선 재료산업이다. 제조업이 강하기 때문에 반도체?나노산업의 경쟁력이 있다. 둘째, 담수화 산업도 해볼 만한 분야 중 하나다.”

-한국 젊은이들의 역동성이 떨어진다는 우려가 있다.
“서울대 학생들을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해보면 부유층 자녀가 많다. 입시제도를 바꿔 도전적인 아이들을 뽑아야 한다. 정부도 대학을 믿고 밀어줘야 한다.”

-대학에 기부가 많아야 하는데.
“우리 대학은 기업들의 기부금을 받는 게 대부분이다. 개인이 기부한 건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 대학에서 많이 배워 고마움을 느끼면 대학에 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학이 아직 여기까진 못 온 것 같다.”

오세정 1953년 서울 출생. 경기고·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를 거쳐 자연과학대 학장을 지냈다. 88년 ‘전이원소 화합물의 전자구조에 관한 연구’로 한국과학상을 받았다. 교육과학기술부의 BK21 사업기획단 기획위원장과 한국과학재단 이사,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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