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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원스턴 처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965변 1월24일 하오8시35분.
영국의 BBC방송은 갑자기 정규「프로」를 중단하고 「베토벤」교향곡 5번『운명』의 첫악장을 방송했다.
승리를 상징하는 V자의 모르스 부호로 시작되는 이 운명의 첫악장이 끝나자 BBC의 전파는 세기의 영웅「원스턴·처칠」경(당시90세)의 죽음을 알렸다.
이 순간 유명한 「피커딜리」광장은 휘황한 전등을 끄고 위인의 서거를 국민과 함께 슬퍼했고, 지난 50년동안 1면 전면을 1단짜리 광고로만 채워오던「더·타임즈」지는 반세기의 전통을 깨고 『늙은 사자』의 죽음에 관한 기사로 1면을 채웠다. 우유를 배달하던 한 사나이는 이 소식을 듣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으며 도도히 흐르던「템즈」강물은 잠시 그 흐름을 멈추는 듯 했다.『나에게서 꺼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피와 땀과, 그리고 노고의 눈물뿐이다.』
40년5월, 수상직에 오른 그는 2차대전의 와중에 시달리고 있던 영국 국민들에게 이 같이 갈파한 적이 있다.
「브랜디」와 「시가」. 그리고 포커를 즐겨하던 그는 두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룩하고 자유 진영을 승리로 이끈 살아있는 현대사이기도 했다. 「유니언·재크」에 덮인 이 세기의 영웅의 시체가 「런던」시가를 지나가는 순간엔 산천초목이 흐느껴 울었다.
『2차대전 회고록』으로 5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처칠」은 또 평소에 「내가 천국에 간다면 처음 1백만년은 그림 그리는 데 시간을 보내겠다』고 할만큼 그의 유화 솜씨는 뛰어난 것이었다.
북 「아프리카」의 「모나코」등지를 전전하며 그린 그림과 매년 크리스머스 때 손수 부인 「클레멘타인」여사에게 그려준 카드 등은 아직 고가로 매매되기도 한다.
「처칠」이 부친 랜돌프공의 생애를 많이 닮았듯이 지금은 「처칠」의 손자가 조부의 인생 행로를 그대로 걷고 있다. 「처칠」이 수많은 전쟁의 종군 기자로 활약, 명성을 날렸듯이 「처칠」2세는 아프리카의「비아프라」등지를 누비면서 생생한 현지 뉴스를 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영국의 명문 마르바르가의 후예답게 「처칠」가족들은 선조들이 남긴 위업을 계승하려는 의욕이 대단하다.
그런가 하면「처칠」의 딸「사라」같은 말괄량이도 있다.
사라양은 술주정을 하기가 일쑤며 자동차 사고로 경찰에 끌려가는 일쯤은 한달이면 두 세번씩이나 겪는다. 「처칠」이 운명하기 석달전부터 부인 「클레멘타인」여사는 한시도 침대 곁을 따난 적이 없었으나,「처칠」의 운명 직후 모여 든 가족 중에 가장 늦게 나타난 것은 역시 큰딸 「사라」였다.
「처칠」이 41년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대서양 헌장중 영토 불확대, 민족 자결, 국제적 협력,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은 아직까지 「유엔」헌장의 기본 이념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40년대 종전과 함께 철의 장막을 보고 냉전이라는 걸 예고했던 그가 「철의 장막」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고, 냉전이 동서화해로 바뀌는 전환기의 60년대 중반기에 눈을 감은 것은「처칠」개인으로서도 행운이라 하겠다.<김건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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