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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간의 달 착륙-국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난 3천6백50여일 동안의 미·소 우주개발경쟁은 정말로 「시소·게임」 같았다. 마지막에 가서 조차 누구도 승부를 확실히 내다보지 못할 만큼 우주를 무대로 한 양대국의 경쟁은 격렬했다. 그러나 숨막힐 것 같았던 두 「라이벌」의 경쟁은 달에 인간을 4명이나 상륙시킨 미국의 승리로 일단 끝났다.
말하자면 60년대의 경쟁은 50년대에 시작된 미·소 우주개발경쟁 「코스」 제2 「라운드」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2「라운드」 초기에는 소련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50년대 제1「라운드」출발점을 「스타트」할 때부터 생겼던 우열의 차가 제2「라운드」에 들어서서도 여간해서 메워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소 두 나라의 국가위신이 걸려있었고 져서는 안되겠다는 집념이 서려있었다. 그런 만큼 경쟁은 몹시 격렬했다. 57년10월4일 소련이 첫 인공위성(스푸트니크1호)을 발사했을 때 미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쇼크」를 받았다.
우선 소련이 감히 미국을 앞질러 인공위성을 쏘리라고 생각 못한데서 「쇼크」를 받았고 「스푸트니크」1호의 무게가 83·6㎏이나 된다는데서 「쇼크」를 받았다. 미국의 예정했던 첫 인공위성의 무게는 겨우 10㎏ 내외였던 것이다. 59년1월2일 소련은 승세를 타고 첫 인공혹성인 「루니크」1호를 발사했다(미국은 그보다 2개월 뒤에 발사).
그해 9월 14일에는 소련의 「루니크」 2호가 처음으로 달에 명중했다(미국은 약2년반 뒤). 또 약1개월 뒤인 10월7일에는 소련의 「루니크」 3호가 탄생이후 줄곧 지구에 대해 외면해온 달의 뒷면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개가를 올렸다(미국은 7년 뒤 「루나·오비터」로 촬영). .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미국의 참담한 패배로 끝날 것이 뻔한 전망이었다. 58년10월1일에 발족한 NASA(미항공우주국)가 중심이 되어 강력히 결속하여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경쟁에 이기자는 계획으로서 「아폴로」 계획을 새운 것은 이런 급박한 사태에 몰린 결과였다. 달에 인간을 상륙시킨다는 「아폴로」계획이 NASA에 의해 발표된 것은 60년7월29일. 그러나 이때 발표한 것은 계획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할 작정이라는 하나의 생각에 불과했다.
아뭏든 미국은 이렇게 계획을 세워놓고 나서 인간을 인공위성에 태워 지구주위궤도에 올리는 1인승 「머큐리」계획에서만은 소련을 앞지르자고 은근히 다짐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미국은 고배를 마시지 않으면 안됐다. 61년4월12일 소련의 「유리·가갈린」이 처음으로 인간위성선인 「보스토크」1호를 타고 지구를 1주했기 때문이다. 일대 발분을 한 끝에 「아폴로」계획을 승인한 고 「케네디」대통령의 유명한 「우주선언」이 바로 그 뒤인 5월25일 나왔다.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켜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킨다. 미국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해야된다고 나는 믿는다. …인류에게 있어서 이처럼 마음을 울리는 계획은 없다. 장기에 걸친 우주탐험에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계획은 현재론 아무데도 없다. 또 이처럼 실현곤란하고 거기다가 이처럼 경비가 드는 계획은 달리 없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하고 인간의 달착륙을 실현시킨 최대의 원동력이된 그 선언을 『우리들은 달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부터 2백41억불이 투입되고 2만개회사 2백개 대학의 약30만명(연인원으론 약1백만명)의 과학기술자들이 참가하는 세기적인 대「프로젝트」 「아폴로」 계획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4억불이 든 1인승 「머큐리」계획, 약13억불이 소요된 2인승「제미니」계획, 그리고 3인승 「아폴로」계획이 추진되는 가운데 12호의 「콘라드」 선장 등까지 44명(두 번 이상 탄 사람 때문에 실인원은 25명)의 우주비행사가 탄생했고 유인우주비행시간은 약2천3백시간에 이르렀다.
미국과 거의 맞먹는 거액의 우주개발비를 투입한 것으로 알려진 소련은 첫 달연착륙성공 (루나9호=66년2월7일), 달을 도는 첫 손자위성(루나10호=66년4월3일), 처음으로 달을 돌고 지구로 온 두개의 무인 위성선(존드5호=68년9월15일·존드6호=68년11월10일) 등으로 끝내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미국을 위협했다. 그렇긴 해도 미국의 「제미니」계획이 추진되어가던 시기(65년3월23일∼66년11월15일)에 차츰 유인비행분야서 처지기 시작, 「아폴로」12호가 두 번째로 달창륙을 끝낸 현재엔 우주비행사수에서 약반 유인우주비행시간에 이르러서는 반도 안되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소련은 「아폴로」11호가 발사되기 직전에까지도 「루나」5호를 달에 발사. 전세계를 궁금하게 만들었지만 달에 연착륙한 것으로 끝나고 결국 최후의 승리는 미국에 돌려주고 말았다.
한동안 경쟁에서 우세했었지만 「일렉트로닉스」(전자기술)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종합력의 차이 때문에 소련은 눈물을 머금고 달경쟁에서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이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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