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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논쟁 <4> 주대환의 '자유주의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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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사회민주주의연대 주대환 공동대표.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자유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거의 실현되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주대환(59). ‘자유주의 논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최장집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이 내세운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해 그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유럽의 사민주의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 풍토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만약 사민주의와 다른 것이라면 지금 우리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볼 때 우리 사회에 자유주의는 이미 차고 넘친다.

 그가 자유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자유주의 이념이 수행해 온 역할을 우선 긍정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의 강령은 이미 실현됐기 때문에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사민주의”라고 밝혔다.

 그는 1980년대 국내 최대 노동운동 단체인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리더였다. 92년 한국노동당 창당 준비위원장, 2004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등을 역임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를 맞아 탈당했다. 이후 사회민주주의연대를 창립해 ‘후진국형 진보=올드 레프트(구좌파)’의 한계를 벗고 ‘선진국형 진보=뉴 레프트(신좌파)’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23일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 이념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글쎄,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외국에서 자유주의를 공부하고 온 분들이 잘 모르는 것은 한국이고 한국 역사다. 그들은 ‘선각자’라는 사명감으로 자유주의를 전파하지만 그들이 공격하기 위해 돌진하는 적이란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 관치금융 이런 정도이니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나? 돈키호테가 중세의 기사를 흉내내지만 그가 공격하는 적(敵)은 풍차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들이 정부 산업정책의 혜택은 보면서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것을 옹호하는 수준이다.”

 -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근대를 만든 위대한 사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자유주의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1896년 독립협회가 주장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와 책임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거의 실현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자유주의가 사상운동으로서 뚜렷이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한국에서 그 사이에 국민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또 건국 이후에도 언론의 자유, 정치적 자유는 반공을 핑계로 유보되기도 했지만 이 또한 87년에 거의 대부분 실현되었다.”

 - 지금 다시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게 부자연스럽다는 뜻인가.

 “절박하지도, 미래지향적이지도 않다는 거다. 자유주의의 강령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개인의 열정과 창의는 발휘되지 않으며 자본주의 경제는 발전할 수 없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굴지의 자본주의 선진국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지켜야 할 이념이지 청년들의 상상력을 부를 수 있는 이념이 아니다. 과연 자유주의가 독립협회 당시의 청년들의 가슴에 불러일으켰던 열정의 불꽃을 지금 청년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 한국에 어떤 자유주의 강령이 실현되었나.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해방이다. 신분질서라든지 전통적·전근대적 관습이나 속박으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추구한다. 그리고 개인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인권 이런 것들이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또 그 밑바탕에는 사유재산권이 있다. 우리는 이걸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만 근대 이전엔 사유재산이 법률적 권리로서 확립되지 않았다. 지금 북한을 생각해보면 된다. 지금 우리 개개인의 재산은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빼앗지 못하게 철저히 법률로 보호하지 않는가?”

 - 북한을 전근대적 사회로 보는 건가.

 “근대 이전, 다시 말해 자유주의가 도입되기 이전의 사회가 북한이다. 개인이 자립하지 못하고, 책임감도 없다는 얘기다.”

 - 한국에서 자유주의 강령이 언제 실현됐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90% 실현되었고 그 후 87년 민주화까지 자유주의가 밀물·썰물처럼 전진하고 후퇴하는 과정을 거치며 거의 구현되었다.”

 - 87년 민주화를 자유주의 운동으로 보는 건가.

 “군사독재에 반대하니까 민주주의·민주화를 외쳤고, 그게 맞기도 하지만 뭐라 그럴까 그 당시 우리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60~80년대 민주화운동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 민주화운동 이념에는 자유주의·사회주의 등이 혼합돼 있지 않았나.

 “각자의 머릿속에 무슨 관념이 들어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도도 있었고, 불교도도 있었지만 그 많은 사람이 같은 행동을 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다치고, 청춘을 바쳤는지가 중요하다. 모두가 요구했던 가치는 바로 자유주의의 강령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떠들고, 그 말로 인해 잡혀가지 않는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보장이 핵심이었다. 정당한 절차 없이 구속되고 고문을 받지 않는 인권도 요구했다.”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민주주의란 말은 일본 사람들이 번역을 잘못해 자꾸 헷갈린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정치 체제의 하나이지 사상이 아니다. 일인 독재(왕정)냐, 몇몇의 과두정(귀족정)이냐, 다수 대중의 지배(민주주의)냐, 셋 중의 하나란 얘기다. 영어로 ‘이즘(ism)’이 아닌데 ‘주의’를 붙여 번역해 혼란스럽게 하였다. 민주정(民主政)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비교 대상이 아닌가.

 “그렇다.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이념 모두 민주정치 체제를 존중하겠다는 뜻을 표현한 용어다. 실제 자유주의자도 독재를 할 수 있고, 사회주의자도 독재를 할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민주정체의 틀 안에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를 하겠다는 것이다.”

 - 결국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인가.

 “자유주의는 근대를 만든 사상이고, 사회주의는 현대를 만든 사상이라고 나는 본다. 자유주의가 먼저 나와서 근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허점들이 나왔다.”

 - 어떤 허점인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다 보니 똑똑하고 운이 좋은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좀 덜 똑똑하거나 운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 가지는 현상이 바로 나타났다. 19세기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이 그러했다. 개인의 능력 차이가 굉장히 큰데, 거기다가 운까지 따르고 대를 이어가면 그 격차는 어마어마해진다.”

 - 그 격차를 줄여보자는 게 사회주의인가.

 “그렇다. 가능하면 격차를 없애자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하면 인간은 모두 똑같이 신의 자식으로 평등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현실의 불평등은 너무 크다.”

 -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뭐가 다른가.

 “글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자유주의의 주장이 실현돼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는데, 동시에 그런 과정을 거치며 자유주의의 영향력은 감소된다. 이후 사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복지국가가 큰 흐름을 차지하다가 다시 복지국가의 허점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대처 총리 시절 자유주의가 다시 부흥하게 되는데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부르지만 사상적으로 크게 새로운 내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 대개 신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민경국 강원대 교수는 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이 좌파가 만들어 낸 선전이라고 했는데.

 “금시초문이다. 신자유주의란 말의 어감이 나쁜가? 더욱이 그 말을 좌파가 비난을 위해 악의적으로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민 교수가 자신의 사상을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학자로서 훌륭한 태도라고 본다.”

 - 신자유주의 관점에선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허용하면 모두 좌파로 분류하는 듯하다.

 “정직한 말씀이라고 본다. 원래 자유주의에는 그런 아이디어가 없었고, 사회주의로부터 온 것들이니 말이다.”

 -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는 어떤 차이인가.

 “세계 지식인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로 하면 사민주의는 곧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은 사민주의자의 국제단체다. 예컨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 당원은 사회민주주의자로, 프랑스의 사회당 당원은 사회주의자로 불리지만 이들의 사회민주당이나 사회당은 같은 것 아닌가.”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어떤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공산주의는 전근대적이고 반문명적이다. 러시아가 공산화할 당시 제정 러시아는 농노제 상태였다. 당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더 봉건적이었는데 거기서 돌연변이를 일으켰으니 오죽 기괴한 것이 되었겠나.”

 - 진보적 정치학자 최장집 이사장이 자유주의를 새로운 진보의 이념으로 내세웠는데.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자유의 나라’ 미국 땅에 유럽의 사민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에 자유주의의 일종이라고 한 것이다. 최 이사장의 진보적 자유주의도 미국의 좌파, 즉 민주당에서 얘기했던 진보적 자유주의인 것 같고, 내가 볼 때 사민주의와 대동소이하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미국판 사민주의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진정 자유주의라고 한다면 그게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미 차고 넘치는 게 자유주의인데.”

 - 최 이사장은 자유주의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진보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 점이 나와의 차이일 수 있겠는데, 한국의 보통 시민들이 얼마나 자발적이고 자립적이며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는 책임감이 강한지를 주목해야 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이 이미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는 거다. 5년 전인가, ‘워낭소리’라는 독립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경북 봉화 산골의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다. 그분들이 얼마나 자립적이고 자조적인가, 80대의 나이에도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거절하고 딱 두 분만 산다. 그게 대한민국 사회다. 자유주의라는 게 각자 개인이 알아서 하자는 것이라면 봉화 산골의 자영농을 무시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 산골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9남매를 낳아 다 길러내고 현대적 직업을 갖게 교육시켰다. 그분들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 부모세대가 아닌가?”

 - 결국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름을 뭐라 하든 사민주의라는 얘긴가.

 “자유주의가 깊이 뿌리내린 한국은 이미 각자도생의 개인주의 사회가 됐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도 안 가진다. 자립·자조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데 이미 지나친 수준이다. 상위와 하위 계층 간 임금과 소득의 격차는 현재 상태도 심각하지만 심각해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OECD 최장 노동시간을 한쪽에서 얘기하지만 다른 쪽에선 일자리조차 못 찾는다. 이게 과연 자유주의로 다 해결이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볼 땐 자유주의는 뿌리를 내렸지만, 사회주의가 부족해 균형을 못 맞추는 것이다. 음과 양의 조화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진보적 자유주의나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식의 수식어 붙은 자유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어떻게 보는가.

 “어떤 비율이든 자유주의에 사회주의를 조금씩 가미하고 자유주의를 더 발전시켜 한국 현실에 유용한 이념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본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쿨하게 자유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는 말씀도 가끔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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