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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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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안도가 아무개의 손자라서 견문이 있는 괜찮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사리 분별도 할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너는 무엇 때문에 이런 비방을 듣는 것이냐?'(1569년 10월 28일)

'내 병은 대개는 나았다. 나머지 증세는 네 아버지가 적어 가기는 했지만, 먼 곳에 가서 약을 구하다 보니, 약을 구하면 증세는 이미 달라져, 이 때문에 어려움이 있구나'(1564년 10월 10일)

'양가죽옷 한 벌을 20년이나 입다보니 지금 죄다 헤져버렸다. 새로 구입할 비용이 없어서 걱정이다.'(1562년 11월 16일)

퇴계 이황이 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우리 곁의 보통사람으로 부활하고 있다. 공부를 게을리한다고 손자를 따끔하게 꾸짖거나 자신의 병을 걱정하는 모습은 여느 할아버지나 다를 게 없다.

퇴계학연구원의 정석태 연구원은 "기존 문집은 부피 등을 고려해 일상 내용은 빼고 주로 학문적인 글을 실은 것 같다"며 "이번에 공개된 자료 중에서 눈여겨볼 것은 퇴계의 인간적인 모습을 되살려 줄 글들"이라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으로 퇴계학연구원이 2003년 5월부터 지금까지 촬영을 끝낸 퇴계 저작 관련 고문헌 및 고문서는 총 4만5000여쪽. 도산서원 광명실 및 상계 광명실 소장 자료 3만4000여 컷 외에 대구 계명대학교 등이 소장하고 있는 퇴계관련 자료 1만1000여쪽도 들어 있다. 퇴계의 중요한 글은 거의 망라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퇴계학연구원은 앞으로 10년 계획으로 퇴계의 글을 모두 수집 정리해서 교감 및 표점 작업을 거쳐 '정본퇴계전서(定本退溪全書)'를 엮어 연구자들에게 기초 자료로 내놓을 계획이다.

◆'퇴계선생문집'초본
= 퇴계 사후 30년 만인 선조 33년(1600년)에 간행된 '퇴계선생문집'의 바탕이 되었던 '원고'를 말하며, 가장 중요한 자료다. 퇴계학연구원에서는 이를 국보급으로 평가한다. '퇴도선생집(退陶先生集)'(20책), '퇴계선생집(退溪先生集)'(40책),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27책),'퇴계선생수간(退溪先生手簡)'(1책) 등이 그것이다. '퇴계선생문집'의 초본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이한 점은 '퇴계선생문집'의 초본이 세 종류나 전한다는 사실이다. 이 초본 중에서 가장 먼저 엮어진 초초본(初草本)이 '퇴도선생집'20책이고, 이 초초본을 보충한 것이 중초본(中草本)'퇴계선생집'40책이며 다시 이 중초본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 정초본(定草本)'퇴계선생문집'27책이다.

초초본 '퇴도선생집'의 교정은 제자 김성일과 유성룡, 손자 이안도 등이 맡았고, 중초본 '퇴계선생집'은 제자 김성일.유운룡.유성룡.금봉서와 손자 이안도 외에 제자의 제자인 김해와 김윤안 등도 교정작업에 참여했다.

◆'병인도병록'실물 확인
= 여러 문헌에 퇴계가 1566년에 손수 엮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수본(手本) 시집 '병인도병록(丙寅道病錄)'을 찾아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퇴계가 10권의 수본 시집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물은 '퇴계잡영' '도산잡영' '매화시첩' 3권만 전해졌다. 그런데 이번에 '퇴도선생집'(초초본)에서 '병인도병록'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수정에 수정을 가한 '성학십도'
=중초본 '퇴계선생집'에 담긴 글에는 연월일이 기록되어 있어서 퇴계의 사상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퇴계가 1568년(퇴계 68세) 12월 그때 나이 17세이던 어린 왕 선조에게 성리학의 원리를 쉽게 그림으로 설명해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는 퇴계의 임종 직전까지 여러 차례 수정됐다. 1569년에 교서관에서 간행할 당시 '성학십도'에는 제7도가 '심학도'(心學圖), 제8도가 '인설도'(仁說圖)로 되어 있었으나 '퇴계선생문집'에 와서는 순서가 서로 바뀌었다.

'성학십도' 중에서 퇴계가 중점적으로 수정한 것이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퇴계는 이 '심통성정도' 중.하도(中.下圖)의 그림을 4차례 이상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이 '심통성정도' 중.하도의 그림은 구도(舊圖)와 개정본(改本) '답김이정별지(答金而精別紙)'가 존재한다. '퇴계선생문집'등에 실린 '심통성정도'는 퇴계가 최종적으로 수정하라고 지시한 개정본이 아닌 중간 수정본인 듯하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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