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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골드코스트, 연 1000만명 찾는 공원에 참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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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구촌 곳곳에는 많은 이가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에 6·25전쟁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하기 위해 들른 것이 아니어도 방문한 뒤 자연스럽게 추모하게 된다. 사진은 호주 참전용사 레이먼드 디드(왼쪽)와 리처드 헤더링턴이 퀸즐랜드주 참전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매해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호주 최대 휴양지 중 한 곳인 퀸즐랜드주 골드코스트시. 지난 9일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 캐스케이드 가든에 들어서자 푸른 잔디밭과 울창한 나무숲이 곳곳에 펼쳐졌다. 벤치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바비큐장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아들 오스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 나온 카트리나 쇼(33)는 잔디밭을 거닐다 캐스케이드 가든의 초입에 위치한 석조 건축물 앞에 멈춰 섰다. 태어난 지 일곱 달이 조금 넘은 오스카가 증조할아버지의 예복에 달려 있는 반짝이는 메달에 자꾸 손을 뻗었다. 얼굴에 한 가득 미소를 머금은 할아버지는 한 손으로 증손자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옆에 있는 굳은 표정의 무명용사 동상을 어루만졌다. 생전에 알았던 사람이라도 되는 듯 애틋한 눈빛으로 동상의 손을 잡는 그는 6·25 전쟁에 참전했던 노병 레이몬드 디드(85). 이들이 멈춰선 곳은 바로 2011년 세워진 퀸즐랜드주 호주군 6·25 전쟁 참전비 곁이었다.

 디드는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가평전투(1951년 4월 23~24일)에서 직접 싸웠다. 디드는 “내 생일이 가평전투 직후인 4월 25일인데 당시 숨진 전우들 생각에 이후 내 생일을 한 번도 축하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산책하듯 공원을 찾았다가 참전비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참전용사 가족뿐만이 아니다. 참전비의 위치가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공원인 데다, 골드코스트 해변과 하천을 잇는 길목이기도 해 무심코 지나다 무명용사 동상을 보고 궁금증에 다가오는 이들이 더 많다.

 기자가 참전비를 지켜본 한두 시간 동안만 해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진부터 찍기 시작하다 비문의 문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나는 방문객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안종철 참전비 건립추진위 회장은 “6·25 전쟁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처음부터 많은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접근성 좋은 곳을 찾았다”며 “시 관계자가 ‘이 땅은 3000만 달러를 줘도 못 산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로 좋은 입지”라고 설명했다.

 참전비 건립의 주역인 참전용사와 이곳 교민들은 지금은 매해 호주 청소년 70~80명을 가평 등으로 초청하는 일명 ‘가평 피스 캠프’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호주는 추모가 일상이 된 대표적인 국가다. 본토가 전쟁을 겪은 적이 없기에 오히려 다른 나라의 분쟁에 참전해 흘린 피를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참전 용사들이 곧 ‘피로 지켜낸 민주주의’라는 최고의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호주의 수도 캔버라 중심에 전쟁 기념관과 국회 의사당을 마주 보도록 건축한 데에도 나랏일을 하면서 순국선열의 희생을 항상 기억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2006년 재단장한 기념관의 한국전관은 인물 중심의 스토리텔링식으로 전쟁을 재연해놨다. 제3대대 소속으로 전쟁 중 두 차례나 포로로 잡히고 탈출하기를 반복했던 로버트 파커(86)가 당했던 혹독한 처우도 이곳에 기록돼 있다 . 중공군이 그의 이빨 사이에 대나무 조각을 끼우고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입을 주먹으로 때렸던 일은 애니메이션으로 재연됐다. 샤론은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6·25 전쟁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념관의 역사학자 마이클 켈리는 “역사를 종이에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 : 뉴욕·오타와=정경민 특파원, 워싱턴·내슈빌=박승희 특파원, 런던·버튼온트렌트=이상언 특파원, 파리=이훈범 기자, 아디스아바바·메켈레·앙카라=정재홍 기자, 마닐라·방콕·촌부리=강혜란 기자, 보고타·카르타헤나·키브도=전영선 기자, 캔버라·골드코스트=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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