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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에 의한 첫 상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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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따라서 이 시기는 활동사진의 도래기로서 우리나라사람이 간여 한 것은 관객으로서 일뿐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물론 상영의 과정조차 외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효시「의이적 구투」우리영화의 효시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서 공연된 금도산이 이끄는극단「신극좌」의 연쇄극『의이적구투』다. 이로부터 연극의 사이사이에 무대 위에서 처리 할 수 없는 부분을 영화로 보여준 연쇄판은 계속 나타났는데 이기세 지휘의「문예단」 의『지기』 임성구의「혁신단」의『학생절의』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에 이어 연쇄극이 아닌 완전한 영화로서 나타난 것이 윤백남 작·감독, 이월화·권일청주연의『월하의문석』(23년) 였으며 영화예술로서, 민족영화로서 비로소「영화」의 진면목을 보인 것은 26년에 나온 나운규의『아리랑』이었다.
노래 속에 항일정신 특히 중요한 것은 민요「아리랑」과 다른「아리랑」의 주제가가 가수 이정숙 에 의해 불리어졌는데 이 가사에는『…문전옥답은 다 어디 가고 쪽박이 신세가 웬 말이냐』하는 부분이 있어 항일정신을 표출하고있다.
1935년 최초의 발간영화『춘향전』이 출현했으며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걸쳐 경향파 영화가 나타나고 이시기를 전후해서 제1차「프로덕션」난입시대가 형성됐다
37년 지나 사변이 발발, 일본의 이른바「대동아정책」에 따라 극심한 탄압정치가 시작됐으며 40년1월「조선영화분」이 공포되고 사단법인「조선영화주식희사」가 만들어 졌다. 이때 윤봉탄·이규환등 몇몇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인들이「조선영화인협회」에 가담 군사 영화에 협력하는 비운을 겪었다.
해방이 된 45년 이후 사상대립과 군정하 에서 만들어진 광복영화는 유치하나마 민족의 희망을 재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면세조처로 활기>
57년 우리 영화는 정부의 국산영화 보급면세조처로 말미암아 1백50편을 생산, 영화 중흥기에 들어갔다.
55년 제2회「아시아」영화제에「업저버」로 참가했던 우리나라는 57년 제4회「아시아」 영화제에서 이병일 감독의『시집가는 날』이 특별 희극 상을 획득함으로써 해외진출을 기하게됐다.

<「춘향전」일본상영>
그러나 우리 영화의 해외진출은 이미 23년 일인조천호주가 변사 김견성·예기 한초을 주연으로 만든『춘향전」이 일본에서 상영되었으므로 이것이 먼저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최초의 합작영화는57년 한국 연걸 주식회사와 「홍콩」소씨제편공사·삼용영편공사합작『천지유정』이었다. 이로부터 합작영화가 장려되고 외국영화제에의 참가가 잦아졌으며 우리영화의 국제적 진출문제가 구체적으로 대두되었다.
더우기 TV시대의 도래와 협소한 시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영화계의 노력은 69년의「마닐라」한국영화 견본시를 마련케 했다. 이영일씨는 한국영화50년을 통틀어 볼 때 두 가지사실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역사적으로 아무 제약 없이 영화를 만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며, 영화 예술의 두가지형식 신파「멜러·드라머」와 예술영화적 시도가 완전히 별개로 존속해 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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