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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대폿집서 한잔 걸친 박인환·이진섭 나애심에게 즉석으로 지어준 ‘명동 샹송’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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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06면

전후 명동시대를 풍미했던 문인들. 오른쪽 첫째가 시인 박인환, 그 옆이 언론인·작가 이진섭이다. 1955년 찍은 사진이다. [사진 박기원]

“명동은, 실로 / 정치와 돈이 침투할 수 없었던 / 인간의 영토가 아니었던가 // (중략) // 네 돈 내 돈 따짐 없이 / 밤깊이 서로 마시며 / 가난하면서도 왕자들처럼 떠들어대던 / 아, 그 황홀한 포기의 연대.”

가요 ‘세월이 가면’ 탄생으로 본 50년대 지식인들의 삶

 시인 조병화가 1983년 친구 이진섭을 애도하며 쓴 조시(弔詩)의 일부다. 제목도 친구의 이름 석 자로 갈음했다. 언론인이자 음악·연극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이진섭은 그해 3월 62세로 세상을 떴다. 이들은 6·25 전후 서울 명동을 아지트로 삼았던 문화예술인 그룹의 핵심이었다. 조병화는 자신과 이진섭이 “삼국지의 영웅들처럼 해방된 서울 명동을 웅거했다”며 “벗들은 하나하나 사라져간다”고 아쉬워했다. 그도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엔 중국·일본 관광객들이 점령하다시피 한 명동이지만 해방 공간과 6·25 세대에게 명동은 해방구와도 같았다. 동방살롱·휘가로·돌체 같은 다방에서부터 은성·경상도집 같은 대폿집까지 예인들의 사랑방이 가득했다. 조병화·이진섭은 물론 시인 박인환·김수영·조지훈, 작가 전혜린 등이 진을 치고 맥주와 막걸리를 거나하게 걸쳤다.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날엔 조니워커 위스키로 호기를 부렸다.

 문화예술인들의 술자리에 시와 노래가 빠질 순 없는 노릇. 56년 3월 초의 밤도 그랬다. 이진섭과 박인환이 막걸리를 마시며 함께 자리한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 곡 청했다. 나애심이 “마땅한 노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박인환이 즉석에서 쓱쓱 시를 써내려 갔고 여기에 이진섭이 즉흥으로 곡을 붙였다. ‘명동 샹송’으로 불린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명동의 터줏대감이자 ‘명동 백작’으로 불린 이봉구와 성악가 임만섭이 합류했다. 나애심에 이어 임만섭도 노래를 불렀다. 대폿집은 곧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약 일주일 후인 3월 20일 박인환이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니 ‘세월이 가면’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는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 사랑은 가고 / 옛날은 남는 것.”

 언론인·소설가인 이봉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첫 발표회나 다름없는 모임이 동방살롱 앞 빈대떡집에서 열리게 되었다. 박인환은 벌써부터 흥분이 되어 대폿잔을 서너 잔 들이켜고, 이진섭도 술잔을 든 채 악보를 펼쳐놓고 손가락을 튕기는가 하면, 그 몸집과 우렁찬 성량을 자랑하는 임만섭이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모여들거나 말거나 곁에 앉은 손님들이 보든 말든 이들 세 사람 입에선 샹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 눈물 난다. 인환이 어쩔라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야무진 사투리로 빈대떡집 젊은 마담이 박인환의 어깨를 치기도 했다.”(이봉구, 명동, 그리운 사람들) 극작가 한운사는 이날 밤을 두고 “젊음과 낭만과 꿈과 산다는 것의 슬픔을 그(이진섭)가 타고난 재간으로 융합시킨 이 순간은 명동이 기억해둘 영원한 시간”이라고 묘사했다.

이진섭(오른쪽)·박기원 부부. 60년대 유성온천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의 사진이다.

 그들이 풍미한 명동 시대는 저물었지만 ‘명동 샹송’은 시대의 유산으로 남았다. 후배 가수 여럿이 리메이크를 했고 여전히 방송에서 종종 흘러나온다. 이진섭의 유족들에겐 매달 꼬박꼬박 저작권료도 지급된다. 적을 때는 4만8000원, 많을 때는 15만원을 넘기기도 한다. 지난달 말엔 17만8900원가량이 은행 통장에 찍혔다. 노래방·방송국 등이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통해 지급하는 금액이다. 저작권협회에 따르면 노래방에서 한 번 불릴 때마다 490원씩 지급된다.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가족에겐 남편이며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끈과 같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아들 이기광(52)씨는 “통장을 볼 때마다 마치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계신 것 같은 느낌”이라고 전했다.

 부인 박기원(84) 여사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세월이 가면’ 노래가 나올 때면 보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고 했다. 남편이 ‘세월이 가면’을 작곡한 날의 기억도 생생하다. “명동에서 그 노래를 작곡한 날 남편은 집에 들어와 내가 시집올 때 가져왔던 장난감 피아노를 꺼내왔어요. 음정을 잡기도 하고 멜로디를 다듬기도 하면서 오선지에 채보를 하더군요.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칭얼거리는 기진이(맏딸)를 보며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세월이 가면’은 박 여사에게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思夫曲)과 같다.

 이진섭은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후 서울신문·코리아헤럴드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KBS 아나운서로도 일했다. 틈틈이 희곡이며 소설을 썼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작곡을 했을까. 박 여사는 “남편은 원래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반대해 꿈을 접었으나 음악에 대한 관심은 평생 이어갔다”고 했다. 4남매 중 두 딸 모두 음악을 전공한 것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결과였다. 서울신문 부국장과 극단 산울림 대표를 지낸 김진찬은 저서 그 사람 그 얘기에서 이진섭을 ‘팔방미인의 재사(才士)’라고 추억했다. 금슬 좋았던 부인 박 여사의 필력 역시 대단했다. 서울신문·경향신문 기자 출신으로 소설을 썼던 박 여사는 83년 남편을 떠나 보낸 석 달 후 추모 글을 모아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를 내놓았다.

 50년대 명동의 역사를 추억하는 이들은 이외에도 많다. 역시 명동을 주 무대로 활약했던 작곡가 나운영(1922~93)의 아들 나건(57)도 그중 하나다. 나운영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 명동으로 출근하다시피 하셨어요. ‘돌체’ ‘하모니’ 같은 클래식 다방에서 작곡도 하고 제자들에게 레슨도 하셨죠. 친구분들 만나는 약속장소도 죄다 명동으로 잡았으니 아버지가 외출하시면 으레 ‘아, 명동 가시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작곡가 나운영에게 명동은 일터이자 쉼터였던 셈이다.

 50~60년대 명동의 낭만을 주제로 지난해 ‘명동 이야기’라는 전시를 열었던 서울역사박물관의 정수인 학예사는 “6·25의 상처가 여전했던 당시 명동은 문화예술인이 모여 창작욕을 불태우던 주옥 같은 공간”이라며 “‘세월이 가면’의 탄생 스토리는 당시 명동의 의미를 압축한 대표적 일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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