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1년뒤 서울… 구보씨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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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4년 어느 겨울 아침 소설가 구보씨는 조간 신문을 펼쳐 들고는 잠시 격세지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기사는 용산과 동두천의 주한 미군 기지가 평양 근교로 이전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북한 핵위기가 고조되어 한반도에서 금방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던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2003년 2월 구보씨는 어느 일간지의 시론에서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불가침 협정보다는 차라리 상호방위협정이 더 현실적"이라는 주장을 했다. 9.11 사건 이후, 미국은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보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미국에 잠재적 적국인 자신을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참으로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차라리 상호방위협정을 통해 진정한 우방으로 거듭나자는 편이 미국으로서는 오히려 더 들어주기 쉬운 요구이리라는 것이 구보씨의 주장이었다.

나아가 구보씨는 한반도의 전쟁방지를 위한 최선의 방안은 남한에 있는 미군 기지의 대부분을 북한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북한과 미국 당국이 이러한 주장에 점차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달 전의 일이었다.

북한은 상호방위협정에 따라 미군이 평양에 주둔하게 되는 것은 가장 확실한 체제보장 방안이라 보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미군 기지의 이전 가능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자마자 개성.신의주 등 북한 주요 도시들은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 보고 앞다퉈 유치 경쟁을 시작했다.

미국 역시 미군에 대한 일부 남한 시민들의 반감, 그리고 날로 치솟는 주둔 비용 등으로 서울 한복판에 미군 기지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고도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고민하던 미군에게 저렴한 주둔 비용과 철저한 보안이 보장되는 북한은 그야말로 최상의 주둔 후보 지역으로 떠올랐다.

또한 북한의 핵개발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날로 커지는 중국의 패권에 대항하여 동북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있어 북한 내의 미군 주둔은 최상의 선택이었다.

물론 미국 내 일부 강경파들은 북한이라는 강력한 '깡패'국가의 위협이 사라지면 미사일방어망(MD) 프로그램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북한과의 상호방위협정 체결에 반발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궁극적인 상대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점을 넌지시 암시하면서 강경파를 설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도 한반도 정책 기조가 '한반도 내에서의 두 개의 한국 유지 전략'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들 역시 이제 '굶주린 적을 번영하는 친구로 변화시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 역시 주한 미군의 평양 이전을 크게 환영하면서, 이전비의 일부를 부담하겠다고까지 나섰다.

물론 중국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으나 미국과 남북한은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 가능성 억제, 북한의 핵개발 포기, 북한 난민 문제 해결 등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소극적이나마 중국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문을 덮은 구보씨는 북한으로 이전하는 미군 기지들이 남한 주둔 시절의 경험을 거울삼아 환경오염이나 범죄 등의 문제를 더이상 일으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金周煥(연세대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