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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교과서 대신 정보통신 활용이 대세”vs“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해야 창의력 커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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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14면

5일 오후 서울 이태원초등학교 학생들이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조별 과제를 하고 있다. 수업 내용 이해가 쉽고, 집중도 잘된다는 게 학생과 교사들의 평가다. 최정동 기자

#1. 5일 오후 1시, 서울 이태원초등학교 2층 스마트 교실. 4학년 학생 21명이 사회 수업으로 ‘안내도 만들기’를 배우는 시간이다. 수업을 맡은 손범석 교사가 분필 대신 터치펜을 들었다. 칠판은 영상 기능을 갖춘 전자칠판이다. 전자칠판의 아이콘을 클릭해 브라우저를 열고 지도 프로그램을 띄운 손 교사가 “이제 조별로 오시는 길 안내도를 만들어 봐요”라고 하자 각 조 앞의 학생용 전자칠판이 켜졌다. 교실은 창문 쪽을 뺀 3개 면이 모두 전자칠판이고 빔 프로젝터 6대가 설치돼 있다. 스마트 교육과 인성 교육을 함께한다는 학교 방침에 따라 학생들은 서로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학생들은 안내 지도를 어떤 식으로 만들지 서로 토론하면서 웹에서 각종 자료를 받아 과제를 수행했다. 권구원군은 “검색하며 함께 과제를 하면 40분 수업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고 말했다. 유재준 교장은 “아이들이 스마트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오히려 바람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 문제해결 능력도 길러지고 흥미가 높아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말했다.

#2. 같은 날 오전 경기도 양주시 효촌초등학교 5학년 1반 교실. 학생들 손에는 각자 로자파크스, 나의 이야기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로자파크스는 1950년대 미국에서 유색인종과 백인의 좌석이 나눠져 있던 시절, 부당한 제도에 저항해 흑인 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된 인물이다. 수업 전 정인영 교사는 학생들에게 새 책의 냄새를 맡아보라고 권했다. 한 학생이 “우리 집에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책이 있는데, 그 냄새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책을 읽은 학생들은 정인영 교사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앞다퉈 의견을 발표했다. 최영훈 학생이 “저라면 무서워 자리를 비켜줬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박수연 학생은 “인종차별은 나쁘니까 법을 바꿔야죠. 저도 로자파크스처럼 저항했을 것 같아요”라고 말을 받았다.
정 교사는 “정보 전달은 디지털교과서가 낫겠지만, 전통적인 종이책의 장점도 있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따져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 깊이 있는 사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떤 교실 풍경이 바람직할까. 확실한 것은 교육부도 아직 답을 모른다는 점이다. 2011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의 계획은 2015년까지 전국 초·중·고 모두에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디지털교과서는 교과서를 웹이나 CD-ROM에 담는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태블릿PC 등 스마트 단말기를 활용하며, 무선 통신망을 이용한 교사·학생 사이의 쌍방향 학습을 한다. 전자칠판, 무선 중계기, 평면TV, 프로젝터 등 각종 장비가 필요하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지금쯤 상당수 학교에서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교육부가 지정한 전국 100여 개의 스마트 교육 시범학교에서만 일부 시행되는 수준이다. 그나마 스마트 전용 교실을 갖춘 곳은 절반이 안 된다. 교육부가 아직 디지털교과서를 포함한 스마트 교육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범학교 100여 곳에서만 일부 시행
가장 큰 이유는 스마트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 다툼이다.
사업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효용성이 확실치 않은데 부작용은 뚜렷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인 동서문화사의 고정일 대표는 “디지털 치매라는 말에서 보듯 스마트 기기가 자발적인 사고 능력을 파괴한다는 연구가 많다. 특히 뇌를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린이들에게 안 좋다. 읽고 쓰고 말하고 상상하는 과정을 거쳐야 창의력이 커지는데, 디지털교과서가 모든 걸 예쁘게 그려서 대신해 주면 어렵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연구원도 “디지털교과서가 종이교과서보다 학습효과가 좋다는 보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면 도입하라는 것은 단말기를 팔려는 ICT 기업의 생각 아닌가. 아예 하지 말라고는 못하지만 교수 학습모델이나 교실환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꼭 필요하다는 쪽은 현실을 보라고 한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70%로 세계 1위다. 초등학교 저학년들도 스마트폰을 쓰는 나라다.
교육학술정보원 관계자는 “요즘은 학교폭력의 절반 이상이 카톡·문자 등 스마트 기기를 매개로 이뤄진다. 부모와 교사 눈에 안 보인다고, 아이들이 안 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활교육 측면에서도 스마트 기기를 제대로 활용하고 이걸 소통의 도구로 쓸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스마트 교육 시범학교인 경남 김해시 한 초등학교 송모 교사는 “일단 학생들이 재미있어 한다. 부작용을 얘기하는데 학생들은 스마트 기기로 협업 수업을 하면서 게임·카톡 등 단순 기능 외에 다양한 활용 방안을 익히게 된다. 아이들의 적응을 보면, 무조건 천천히 단계적으로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디지털교과서 관련 사업을 하는 출판·정보통신 업계의 모임인 디지털교과서협회 오옥태 사무국장은 “스마트 교육은 21세기에 필요한 인재를 만들려면 지금까지의 교육 패러다임으로는 어렵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 상황에 맞는 맞춤형 학습을 시키고 토론형·주제별 협동 수업을 통해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주자는 것이다. ICT가 이걸 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말기 보급에만 3조6000억 소요”
예산도 문제다. 고려대 홍후조(교육학)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디지털교과서 도입을 위해 필수적인 단말기(태블릿PC) 보급에만 3조6000억원이 소요된다고 밝혔다. 홍 교수는 “연간 약 40조원인 교육예산의 10% 가까이 된다. 관련 장비와 콘텐트 개발, 유지·관리에 또 돈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좋은교사운동의 문경민 정책위원은 “과거 교육정보화나 e교과서 등 이상적인 목표를 내세워 당장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대대적인 예산을 들인 뒤 뒷감당이 안 된 사업이 많았다. 어떤 정책이건 교육 현장의 구조적 개혁과 환경 개선이 없으면 안 된다. 투자할 곳이 널려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이 나오고, 기한을 정해 하향식으로 밀어붙이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 입장은 다르다. 교육학술정보원 관계자는 “일부에서 3조원, 10조원 등의 수치를 내는데 과장됐다. 단말기를 모든 학생에게 나눠준다는 계획 자체가 없다. 교사와 취약 계층에 대한 단말기 지원부터 시작하며, 디지털교과서 도입도 순차적으로 진행되므로 일시에 큰돈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착을 위해 초기 투자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스마트 교육 관련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아이카이스트 김성진 대표는 “더 좋은 교수 학습모델을 만들고,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콘텐트 개발 등 많은 관련 업계가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 해외 사례를 봐도 정부 주도의 대규모 사업이 있어야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직 정부의 디지털교과서 정책 방향은 뚜렷하지 않다. 올해 초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정책 재검토에 들어간 뒤, 7월 초인 지금까지 정해진 게 없다. 교육·출판 관계자들의 예상을 종합하면 중학교부터 도입하며, 과목은 과학·사회·영어가 유력하다. 교육부 교과서기획과 조재익 과장은 “디지털교과서와 스마트 교육의 사회적 부작용에 대한 여러 의견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왔다”며 “이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정책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총 김동석 정책본부장은 “스마트 교육을 받아들이는 게 시대적 흐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학교 현장의 준비 부족이나 예산문제, 학부모와 교사의 인식 개선 등은 꼭 필요하다.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연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차분한 준비를 통해 단계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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