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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탐사] 양극화가 ‘혁명 도미노’ 부르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0호 31면

지난 4월 말 이집트 카이로의 한 커피숍에 20대 청년 백수 다섯이 모였다. 원두가루가 씹히는 이집트 커피를 이미 여러 잔 비웠다. 연신 빨아대는 물담배 연기는 갈수록 매캐해져 갔다. 가장 어린 하산 샤힌이 투덜거렸다. “무바라크를 몰아냈다고 달라진 게 뭐가 있어? 우린 여전히 직업도 없고.” 유일한 여성인 마이 와흐바가 말을 받았다. “왜, 재판 결과도 다 뒤집을 수 있는 파라오의 재림을 보고 있잖아.”

 모두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낮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타마르루드!” 타마르루드는 아랍어로 ‘거부’ 또는 ‘반란’이란 뜻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목표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하자는 게 시작이었다. 거기에 무르시 취임 1주년인 6월 30일 대통령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는 제안이 더해졌다. 청년들은 서명운동을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실어 날랐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결과는 창대했다. 첫날 수천 명이 서명에 참여했고, 두 달쯤 뒤인 취임 1주년 시위 무렵에는 그 수가 220만 명에 달했다. 군부의 힘을 빌리긴 했어도 시위가 시작된 지 나흘 만에 무르시는 축출됐다.

 이런 속전속결의 경우는 드물지만,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지구촌 전체가 ‘타마르루드’의 물결에 뒤덮여 있는 것 같다. ‘아랍의 봄 2.0’을 맞고 있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과 터키, 남미, 심지어 중국에 이르기까지 성난 함성이 거리를 메운다. 이들 시위의 성격과 요구사항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다분히 사소한 문제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는 이른바 ‘아기혁명(Babylution)’ 시위가 한창이다. 보스니아에선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정치세력 간 다툼으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불발되면서 출생등록이 중단됐다. 독일에서 치료를 받으려던 생후 3개월 여아가 출생증명이 없어 여권을 받지 못하면서 촉발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하지만 시위의 초점은 점점 실업과 빈곤으로 옮겨가고 있다. 브라질의 반정부 시위는 버스요금을 100원 인상하기로 한 데서 비롯됐다. 한 달 넘도록 이어지는 터키의 반정부 시위도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던 탁심광장의 게지공원을 재개발한다는 정부 발표로부터 촉발됐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석학은 이런 시위사태의 핵심세력이 중산층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세계적인 정치 혼란의 공통분모는 경제력과 교육수준이 높아진 중산층의 점증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라는 것이다. 세계적 석학의 진단으로는 실망스럽다. 하나마나 한 소리 아닌가. 어떻게 촉발됐든 시위가 파괴력을 가지려면 중산층 참여가 절대적인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수적으로도 중산층이 모두 집에 앉아 있는데 어찌 수백만 명이 거리에 나설 수 있겠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내가 보기에 지구촌 시위사태의 발화점은 ‘양극화’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 한다고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100원 오른 버스요금, 내 주머니와는 상관없는 공원 개발이익 같은 사소한 일에 대중이 분노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친(親)무르시 세력 측이 내세운 시위 구호가 ‘타자르루드(공평)’인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닐 터다.
 우리도 이미 겪지 않았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말이다. 대선 패배로 공황에 빠진 일부 세력의 과장 광고에 중산층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화나게 한 건 광우병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애꿎은 여배우 이름으로 불렸던 지난 정부의 ‘그들만의 잔치’였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외친 이후 양극화는 세상을 차근차근 집어삼켜 이제는 전 지구적 현상이 됐다. 격차의 가속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이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시할 정도다. 전 세계 상위 0.5%가 전체 부의 35%를 차지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빈부 격차 심화가 성장 지체로 이어진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양극화를 더욱 벌리고 더욱 고착시킨다는 얘기다.
 양극화를 이대로 방치하다간 세계는 혁명 도미노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개도국만의 문제가 아닐 터다. 양극화는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더욱 그렇다. 정부 역할의 변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프랑스 작가 조셉 주베르가 일찌감치 꿰뚫어봤다. “혁명이란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성실성에, 부자가 자기의 부에, 무고한 사람이 자기 목숨에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시기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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