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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가락시장처럼 경매에 부치니 … 일본선 '중고차 조작'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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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일본 최대 중고자동차 경매장인 ‘USS 도쿄’의 경매장. 동시에 10대씩 경매가 진행되며, 좌석 수는 1200여 개에 이른다. 똑같은 크기의 경매장이 같은 건물에 하나 더 있다. 한국의 대표적 경매장인 현대글로비스 시화경매장의 좌석 수는 448개다. [사진 현대글로비스]

나는 중고차다. 신차에 비해 홀대당하지만 알고 보면 내 인기, 새 차보다 좋다. 지난해 신차 판매 대수는 141만 대, 중고차 판매는 322만 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부끄러운 점도 있다. 운전자들은 나를 사면서도 나를 못 믿는다. 내 신상 정보가 워낙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중고차 피해 상담은 1만 건이 넘는다. 피해 내용은 이런 식이다. 18만㎞ 뛴 차라고 샀더니 실제 주행거리가 34만㎞ 이상이었다는 식이다. 차를 판 매매업체는 나 몰라라 한다. 부끄럽다. 불량품을 팔아도 소비자가 도통 알 수 없는 지독한 ‘레몬시장’이다.

 바꿀 방법은 없을까. 이웃 일본에 해법이 있다고 들었다. 지난달 20일 일본으로 날아갔다. 도쿄에서 1시간30분쯤 달려 도착한 지바(千葉)현 노다(野田)시의 자동차 경매장 ‘USS 도쿄’ 앞에서 입이 떡 벌어졌다. 도쿄돔 12배 크기(56만㎡)의 부지에는 내 동료인 중고차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경매장 건물은 대형마트 같았다. 1000여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 차량 매매·등록을 한번에 처리하는 지원 시설…. 건물 2층에는 총 2568명이 동시에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쌍둥이 경매장’ 두 개가 나란히 있다. 경매장에 들어섰을 때 마침 인기 있는 동료인 혼다 시빅 2006년형의 경매가 시작됐다. 경매 시작가는 38만 엔(약 432만원). 인기 차량이 뜨자 경매에 참여한 중개인들이 책상에 비치된 파란색 버튼을 연신 눌러댔다. 경매가는 금방 100만 엔을 넘어섰다. 주행거리가 4만㎞ 남짓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인기를 더했다. 이 차는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120만 엔(약 1366만원)에 낙찰됐다. 이렇게 거래되는 차는 이 경매장 한곳에서만 연간 61만여 대에 이른다. 중고차 판매업자 다키카와 게이치(33)는 “다양한 종류의 차가 한곳에 모이기 때문에 손님이 원하는 차를 신속하게 찾을 수 있어 자주 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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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차 경매는 1967년 시작됐다.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진 않는다. 전문업체 간 거래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의 자동차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 관계자들은 경매가 중고차 시장을 투명하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 의문이 들었다. 한국에선 유통 단계를 줄이고 직거래로 가는 게 유행이다. 차를 사고파는 데 경매를 거치면 유통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 아닐까.

 일본인은 고개를 저었다. 중고차 매입 전문업체 ‘걸리버’의 이토 도모히데(伊藤友英) 매니저의 얘기다. “한 업체가 중고차를 사서 팔면 그 차에 대한 정보는 그 업체가 독점한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외부에선 알 수 없다. 그런데 경매를 하면 품질·가격과 관련된 기록이 남기 때문에 매매업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해관계자가 늘어나면서 시장이 오히려 투명해지는 셈이다. 일본은 ‘소비자→중고차 매입 회사→경매장→중고차 판매 회사→소비자’ 구조가 정착됐다.

 도요타가 운영하는 경매장인 TAA의 모리타 유지(森田雄二) 도쿄 경매장 소장은 깐깐한 품질검사를 강조했다. 그는 “차량이 입고되면 전문 검사요원이 차량의 외관, 수리·사고 이력 등을 점검한다”며 “결과를 10등급으로 나눠 매긴 후 경매 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한다”고 말했다. 경매 기록은 계속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내 몸에 생긴 문제를 슬쩍 덮어버리기는 어렵다. 신뢰가 쌓이면서 지난해 일본에서 경매장에 나온 중고차 수는 721만 대이고, 이 가운데 480만 대가 낙찰됐다.

 그렇다면 경매가 차 가격을 낮출 순 있을까. 한·일 양측 어디에서도 딱 부러지는 통계를 주진 못했다. 그러나 차를 싼 가격에 사면 살수록 좋은 중고차 수출업계의 말은 이랬다. 시오타 유타카(鹽田豊) 일본중고차수출협동조합 전무는 “요즘은 인터넷 경매도 가능하기 때문에 한번에 수많은 차를 볼 수 있다”며 “그만큼 구매 기회가 많아지고, 가격 경쟁도 치열하다”고 말했다. 경매가 중고차 회전율을 높이는 점도 가격에 도움이 된다. 일본 ‘걸리버’는 중고차를 사서 2주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 이토 매니저는 “중고차는 시간이 갈수록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2주 이상 보유하면 배(이익)보다 배꼽(보관 비용)이 더 커진다”고 말했다. 반면 익명을 요청한 한국 중고차 업계 관계자는 “중고차는 땅 장사”라고 말했다. 차를 오래 세워둘수록 땅값, 보관비 등 부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반면 시간이 흐를수록 차값은 떨어진다. 그는 “그래서 주행거리를 조작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최근 리스·렌터카 시장이 팽창 중이다. 일본에선 이 비중이 중고차 시장의 10%다. 리스차는 대부분 새 차를 사서 운용하다 3년이 지나면 중고차 시장으로 넘어간다. 리스·렌터카 업체는 3년 후 가격 예측이 가능해야만 합리적 수준에서 리스·렌트 비용을 책정할 수 있다. 경매시장이 발전한 일본은 이런 예측이 비교적 쉽고, 한국은 예측이 어렵다. 자연히 한국 쪽이 리스·렌트비가 비쌀 가능성이 큰 셈이다. 자동차 물류업체 소잉의 나카오 사토시(中尾聰)는 “중고차 시장은 전형적인 레몬 시장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유통 단계가 늘어나 이해관계자가 많아지는 게 시장 투명화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한국 경매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현대글로비스가 시화·분당·양산에 경매장을 운영 중이다. 중견기업인 동화그룹도 자회사인 동화엠파크를 통해 지난 5월 경매시장에 뛰어들었다. 입지 규제로 인해 공장 지역이 아니면 경매장을 세우기도 어렵다. 한국 경매장은 일본과 달리 소비자가 직접 차를 팔 수 있다. 신청을 하면 경매업체가 차를 받아가서 고객이 쓴 희망가 이상에서 팔아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업체들은 좀 더 소비자가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한다. 일본 2대 경매장인 CAA의 나가노 다카유키(長野孝幸) 영업총괄실장은 “일본 정부는 경매장 육성을 위해 특혜를 주지는 않았지만 규제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복잡한 중고차 세제도 경매장 활성화를 가로막는다. 개인이 중고차 업체에 차를 팔면 1100만원을 기준으로 세금 면에서 업체가 9만원 정도 손해를 본다. 그래서 중고차 업체는 개인-업자 간 거래를 개인-개인 간 거래로 둔갑시켜 세금을 피한다. 경매장은 애초부터 이게 어렵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불리한 세제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다. 곽용호 현대글로비스 시화경매장 부장은 “온라인 경매 등 소비자가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 한국 시화=김영훈 기자

레몬시장 판매자가 아는 정보를 구매자가 알 수 없기 때문에 저질 상품이 유통되는 시장. 중고차처럼 물건을 사고 나서야 품질을 알게 되는 시장이다. 영어로 ‘레몬(Lemon)’에는 불쾌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가 1970년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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