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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과장 결혼 … "혼인 취소까진 안 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사업가인 A씨(41)는 2011년 3월 결혼정보회사 소개로 B씨(37·여)를 만났다. A씨는 미국 유명 대학의 MBA 과정을 수료했다고 소개했다. 재산이 30억~40억원가량 있으며 아버지가 대기업 사장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결혼에 실패한 적이 있지만 6개월 만에 헤어졌다고도 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9개월 만에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보니 A씨의 자기소개는 사실이 아니었다. MBA 과정을 수료한 것이 아니라 단기과정을 마쳤으며 재산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사장은 아니었다. A씨와 전처의 결혼 기간은 7년에 달했다. B씨는 “사기에 의한 결혼”이라며 혼인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가정법원 5부(부장 배인구)는 “혼인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함께 제기한 이혼 청구는 받아들이고 “A씨는 B씨에게 위자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A씨의 자기소개가 비록 과장됐지만 사기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거짓은 아니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 이유다.

 재판부는 “혼인의 성립을 희망한다면 사실을 다소 과장하거나 불리한 사실을 감추는 경우도 있으므로 사기를 이유로 혼인을 취소하려면 혼인의 본질적 내용에 관해 적극적으로 속이는 경우 성립한다”고 밝혔다. 이어 “재산이 없기는 했지만 연 수입이 1억원이 넘었고 비록 단기과정이나마 해당 미국의 대학을 다닌 적이 있던 점 등을 고려해보면 A씨의 자기소개가 완전히 허위라고까지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말했다.

 법원이 혼인 취소를 인정하는 사유는 주로 사기와 협박을 통해 결혼한 경우다. 다만 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실과 다른 정도가 아니라 사전에 알았으면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대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속였던 점이 입증돼야 한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임채웅 변호사는 “법원의 판단에는 혼인계약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기조가 깔려 있다”며 “대부분의 사람이 결혼할 때 자기에 대해 다소 과장되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약간의 학력이나 재산 등을 속였다고 해서 함부로 취소를 해주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 직원이었던 C씨(35)는 결혼 전 보험 사기로 수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동호회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하면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C씨는 2011년 말 결혼한 뒤 3개월 만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를 몰랐던 아내는 C씨에 대해 행방불명 신고까지 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뒤 제기한 혼인 취소 소송에서 서울가정법원은 혼인 취소를 인정하고 1억7000여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D씨(32·여)는 다른 남자와의 아이를 속이고 결혼한 경우다. 남편이 아이가 자신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 올 초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는데 친부관계가 아닌 것으로 나오자 소송을 냈다. 대전가정법원은 지난 5월 혼인 취소를 선고했다.

 한쪽이 심하게 협박해 결혼했을 경우에도 혼인 취소가 인정된다. E씨(30)는 2012년 초부터 사귀게 된 여자친구에게 “헤어지면 죽겠다. 죽어서 평생 고통스럽게 해주겠다”며 협박한 끝에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지난 4월 “강제로 협박당해 한 결혼이므로 혼인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박민제 기자

◆혼인취소=법률상 혼인이 성립했으나 나중에 혼인 성립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점이 드러났을 때 청구할 수 있는 법률적 절차. 혼인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혼인계약을 해지하는 이혼과는 법적으로 다른 절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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