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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때 장일육 초청|후손들 아직도 한국향해 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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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충승도공의 원조는 한국인이었다. 3백50년전 한국인 도공이 「오끼나와」 에 심어놓은 기와 얼은 연면하게 이어져 오늘날 「류규」(유구)문화의 정화를 이루었다.
한국인의 후예들은 가업을 달리하지만 한민족의 피를 자랑하면서 이름속에도 고려의 여자를 돌림자로 하고 단상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있다.
중원선충 저의 중학교교과서 충승역사1백20「페이지」에는 중승도기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한 확실한 고증은 없지만 1616년 일본 「사쓰마」 에서 3명의 조선도공을 추천했으며 그중 장일육이 「와꾸다」(용전)에 자리를 잡고 아내를 얻어 살면서 가전함으로써 한국의 뛰어난 기술이 전해진것같다는 귀절이 있다.
장일육 (일명 헌공)의 자손과 그 제자의 자손들은 지금도 충승에 살고있어 「나하」시 「쓰보야」(일옥)정에서 도기를 구워 팔고 있다.
이들은 청명날이면 「와꾸다」에 있는 장일육 묘소에 모여 제사를 올리는데 올해의 청명날에도 50여명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이들은 지금도 제사에 앞서 한국쪽을 향해 절하는것을 잊지않고 있다.
장일육의 14대손이라는 기간려진씨(56세·상업)는 기자에게 장일육의 기록을 보여주면서 기회를 만들어 조상의 나라를 찾고 싶다면서 그전 족보를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장일육이 충승도기의 원조에 틀림없다고 설명하면서 장은 1616년 상풍의 명을 받고 일관, 삼관등과 합께 「류뀨」에 건너와 당시 남양계의 유치했던 도기를 현재의 것으로 바꿔놨다고 자랑했다.
기간씨가 보관증인 가보에 의하면 장일육은 소록에 살던 「아시미네모씨」(안차령 직중)와 결혼, 이름을 「나까지·레이신」(중지마신)이라고 바꾸고 장남 여족·차남 려원의 두형제를 두었는데 여족씨는 요절해서 후손이 없고 「사까마」씨는 여달씨의 13대손이 된다.
도자기를 아끼던 「류뀨」왕 상풍은 장일육을 몹시 아껴 죽은 다음에 쓸묘지를 하사, 그의 묘는 현재 「나하」시 소록아등 박물관 옆에 있다.
묘소앞에는 울타리를 하는것이 관습이지만 왕이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이묘소는 울타리가 없어 왕은 반드시 길을 멈추고 묘소를 바라봤다는 전설도 있다.
장의 후손은 이제 거의 도업에서 손을 땠으나 그의 제자들의 후손은 지금도 도업에 종사, 도자기거리로 유명한 「나하」시 「쓰보야」정에서 그릇을구우면서 산다.
그런데 그릇을 굽는 굴의 형식은 한국과 같고 도기의 모양도 한국것과 흡사하며 어떤것은 그릇 밑바닥에 일육이라는 한자를 넣어 구웠다.
또한 민화가운데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류뀨」민요호옥절에 대한것이 있는데 이 민요는 「류뀨」에 왔던 장이 고향으로 돌아가려하자 왕이 장을 잡아놓기 위해 그의 청을 다 들어 주었는데 장이 길가에서 만난 유부녀를 아내로 달라고하자 왕이 그녀를 그에게 주었는데 여인이 전남편을 그리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가와라야부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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