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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고정애의 시시각각

정상들의 그 내밀한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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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논설위원

좀 더 물어봐야 했나. 정상의 외교 관련 발언이 정부에 의해 당대에 공개된 전례가 있는지에 대해 다수의 전문가가 “없는 것 같다”고 해서다. 한 전문가만 “비스마르크?”라고 했다.

 143년 전 엠스 전보(Ems Dispatch) 사건을 의미했다. 엠스란 곳에서 산책 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프랑스 대사가 다가가 한 말을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대사가 모욕당한 양 조작해 공개하자 프랑스가 지레 격분, 개전을 선언했었다. 독일 통일을 낳은 보불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문가는 곧 “그건 일종의 덫이었는데…, 국내 정쟁 때문에 공개된 건 기억이 안 난다. 사실 문명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라고 했다. 그마저도 두 손을 든 셈이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화제 삼아 이뤄진 대화였다.

 실제 정상의 말, 특히 정상 간 대화가 통째로 이처럼 ‘신선한’ 상태로 공개된 일이 기억엔 없다. 30년 후 심드렁한 상태에서 볼 텍스트가 지금 눈앞에 딱 하고 있으니 어색할밖에. 유사한 대화록을 보며 독법(讀法)이라도 익혀야 할 지경이다. 문명국의 것은 30년 이상 묵은 거지만 어쩌겠는가.

 194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이 만났을 때 기록이다. 처칠은 스탈린을 향해 “스탈린 대제”, 루스벨트는 “엉클 조”라고 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귀엣말로 “처칠이 오늘 아침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것 같은데 잠자리가 편치 않았던 모양”이라고 험담했다(『처칠과 루스벨트』).

 중·소 갈등이 시작될 무렵인 1958년 니키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의 대화는 이랬다.

 ▶마오=(49년 스탈린 특사에게) ‘내겐 오로지 먹고 자고 똥을 싸는 세 가지 과제뿐이다. 당신들이 (중·소) 우호 조약 체결을 원하지 않는다면 좋다. 맘대로 하라. 나는 내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겠노라’고 말했다.

 ▶흐루쇼프=당신은 내가 스탈린을 비난했다고 나를 비난한다.

 ▶마오=우리도 스탈린의 손가락 열 개 중 세 개는 썩었다고 믿고 있다.

 72년 마오와 리처드 닉슨의 대화도 있다. 마오는 닉슨에게 “한 표 던졌다”고 했다(『중국 이야기』).

 ▶닉슨=(미국 대통령 후보) 둘 중 비교적 덜 나쁜 쪽을 택했다는 말이냐.

 ▶마오=난 우파를 좋아한다. 당신이 우파라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난 우익이 정권을 잡으면 상대적으로 더 즐겁다.

 이를 두고 루스벨트와 처칠이 스탈린을 떠받들고, 마오가 채신머리없게 생리현상을 거론하고 1급 비밀인 외국 정상의 건강 상태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실상 우파였다고 비판해야 할까, 아니면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분투로, 중·소 대화로, 미·중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이해해야 할까.

 정상 대화록은 이처럼 난독(難讀)의 텍스트다. 흉금을 튼 대화가 오가고 고도의 밀고 당기기가 이뤄진다. 계산된 농담도, 정상끼리는 통하는 한탄도 한다. 그러면서 각자 국익을 추구한다. 막상 만드는 과정을 보면 먹지 못한다는 소시지와 유사하다. 이왕이면 제대로 된 걸 만들어내라고 ‘30년 후 유통’이란 빗장도 채운다.

 그게 조기에 깨진다? 그 후유증을 지금 보고 있다. 동일한 103쪽을 보곤 정반대의 말을 한다. 나름 진심이다. 못 말릴 ‘당파적 심장’을 가졌다는 데만 일치한다. 아무리 궁리해도 전면 공개는 피했어야 했다.

 앞으론 이런 일이 없을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야당이, 정보를 통해 안보를 챙겨야 하는데 안보와 명예를 챙긴다는 이유로 국가 기밀을 내주고 회담의 격에선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지면서 기밀 관리엔 로컬 룰을 적용하는 여권이 한심해서 영 불안하다.

 어제 서울 주재 외국 외교관이 했다는 말이아팠다. “이번 사태를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무엇을 위해 회의록을 공개했는지 잘 이해 가지 않는다.” 직설법으론 이럴 거다. “공개한 건 미친 짓이다. 덕분에 노·김 대화를 알게 된 우리야 감사~.”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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