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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피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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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용선, 피난, 2013, 면에 아크릴릭, 301×442㎝.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유치원생 아들은 가르친 적도 없는데 전쟁·미사일·전투기 같은 것에 심취해 있다. 자꾸 전쟁 얘기를 해달라는 녀석의 성화를 슬그머니 조부모에게로 돌렸다. 외할머니, 즉 내 어머니가 손주에게 들려주는 전쟁 이야기란 신무기, 전투 작전 같은 게 아니다. 피난 얘기다. 한강 다리가 끊겨 망연자실하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한 채 가까스로 남으로 남으로 갔던 이야기다. 난리 통에 아기를 잃어버릴 뻔한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당시 그 아기였던 어머니의 기억일 리는 없고 집안에서 구전된 이야기다. 녀석이 커서 아이를 낳으면, 할머니가 돼 있을 나는 무슨 얘기를 들려주게 될까.

지난주 김환기의 ‘피난열차’에 이어 또 6·25 그림이다. 김환기보다 38년 뒤인 1951년 9월, 전쟁 중 태어난 화가 서용선(62)의 ‘피난’(2013)이다.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챙겨 메고, 껴입을 수 있을 만큼 솜옷 두둑이 입고 나선 그림 속 사람들이 철교 꼭대기에서 망연자실 바라보는 곳은 버리고 온 고향일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할 새로운 땅일까. 1·4 후퇴 때 끊어진 대동강 철교에 매달려 기를 쓰고 탈출하던 피난민들의 행렬을 담은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이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박물관 3개 층을 채운 전시 ‘기억·재현, 서용선과 6·25’에서 만날 수 있다.

 강렬한 원색과 과감한 필선으로 역사와 인간의 관계에 주목해온 ‘그림 인문학자’ 서용선씨가 가까운 과거이자 우리의 왜곡된 오늘을 만든 전쟁에 대한 그림들을 내놓았다. 당시의 국제 정세부터 흥남철수,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오늘날의 남남·남북 갈등까지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이 선 굵은 그의 화폭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시에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마루 밑에 여러 달 숨었던 아버지의 초상, 그를 낳기 위해 한강변에서 도강할 배를 기다렸던 만삭의 어머니 얘기도 겹쳐진다. 전시를 기획한 정영목 서울대 교수는 “서씨만큼 한국전쟁에 대해 집중적으로 작업해 온 작가는 없다. 무엇을 주장하거나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나아가 우리 현대사에 대한 ‘시선’과 ‘관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씨는 간접적으로나마 전쟁을 겪은 세대다. “돈암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 숱하게 지나간 미군·국군 트럭의 먼지 냄새, 휘발유 냄새” 같은 몸의 기억이 1·4 후퇴 때 대동강 철교를 넘는 피난민들의 얼굴을 비워두게 만들었다. 편가르기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 모두가, 어느 쪽으로 치우친 해석을 하지 않고 그들이 느꼈을 그 한기에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같은 기억이 없는 전쟁 다음 세대들은 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