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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들 만세를 증명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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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좌담회 참석자><1919년 당시의 연령·직업>
김지환 28세·개성남감리교 전도사 48인중의 1인 탄원서 해외밀송. 현 서울거주
서유준 20세·휘문고보3년 휘문대표로 파고다 선언참가. 현 서울거주
류봉영 23세·명흥학교교사 평북철산서 시위주도. 현 조선일보 부사장
이병주 31세·연전학생회장 김원벽과 모의시위. 현 서울거주
이병헌 25세·천도교대종사경리 손의암 비서로서 활약. 현 서울거주
이용설 25세·「세브란스」의전학생 3·1만세시위에 참가. 현 소사거주
이진구 21세·광성소학교 교사 원산 독립운동 주모자. 현 서울거주·감리교회 목사
정재용 33세·경신학교졸업생 해주대표로 상경 파고다 공원서 선언서 낭독. 현 벽제거주
최은희 16세·경성여고보학생 3·1만세 및 백천시위 참가. 현 서울거주

<사회> 최영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2월25일 하오2시 본사회의실서
사회 어언 3·1운동 50주년을 맞이해 그때 시위·만세에 직접 참가하신 어려분을 한자리에 모시게된 기쁨 그지없읍니다. 이러한 모임은 전에 한번도 없었음은 물론 앞으로도 그리 쉽지 앉으리라 생각합니다. 반세기 전 독립만세의 소용돌이와 함성이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한 여러분은 더욱 감회가 깊으실 줄 압니다. 이자리에는 좀더많은 분을 모셔서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던 온갖 애기를 모아 정리해볼 작정이었읍니다마는 생존해 계신 분이 이제 몇분 안되고 또 지방에 계시거나 노환 흑은 주소가 수소문 안돼 몇분만 모신 점 송구스럽습니다. 그럼 먼저 3·1운동 전의 사회상, 다음에 만세전야 그리고 3월1일과 그후 지방의 모습등 순서로 얘기해 나갔으면 합니다·
류봉 경무합방후 3·1운동까지의 10년을 잘 파악해야 되겠어요. 자칫 잘못 해석해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을사조약때와는 달리 국민들은 올게 왔구나, 나라가 망했구나 그저 체념했읍니다. 그러나 일제밑에서 겪어보니 망국의 설움이 더 뼈저려 어떻게 하면 독립을 하나 간절해진 것이지요. 제1차 대전때만 해도 일본이 연합군에 가담한 까닭에 그연합군이 패하면 우리가 풀리지 않을까 바라는 심정이었읍니다.
그래서 「윌슨」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표명했을 때도 막상 별 영향은 없다가 1918년 초이죠, 상해의 조선인들이 자결주의에 따라 독립운동을 하고있다는 말이 일본신문에 조그맣게 1단기사로 났는데 그것이 자극이 커 어떤 사건을 예견케 했읍니다.
사회 합방이후 1년반까지는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큰 독립운동은 2년뒤 광복회로 나타나는 데 일반적으로 그시대의 독립운동은 도산 안창호의 계몽운동과 의병의 전통을 계승한 무장투쟁의 두갈래로 볼수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때 당한 일이 있으면….

<관서지방서 앞장>
이용 전국을 통해서 관서지방의 배일열이 가장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이등박문도 순종에게 말하기를 『관서지방처럼 나쁜사람들만 모인곳도 없으니 이들은 관리로 채용할수 없다』 고 한적도 있지요. 안악사건으로 황해도 일대의 애국지사를, 1백5인 사건으로 평안도 일대의 애국지사를 각각 일망타진 하기위해 흉악한 연극을 꾸며내기도 했죠.
서유 안악사건, 1백5인 사건도 두드러진 예이지만 제일 큰 것은 역시 광복회 사건이죠.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갖고 유혈투쟁을 별이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굉장했죠.
이진 나는 당시 개성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학생들은 일본 천황을 머슴으로 삼고 황후를 여종으로 삼겠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간도 독립군의 활약으로 나타난 것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 한영서원 창가집사건이 크게 일어났었읍니다.
사회 당시에 변소를 『이완용 식당』이라고 부르고, 개이름을『「완룡」이』『병준』등으로 지어 부르는게 유행이었다는 얘기도 있는데….(일동 수긍한다.)
그때는 모든 행위가 다 독립운동 같습니다. 운동회·연설힉 심지어 노래공부 하나까지도 모두 독립운동 아닌것이 없었읍니다.
유봉 사실 이미 전국민적인 독립운동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족대표는 언덕 (구) 과 같은 것입니다.
사회 3· 1운동 계획의 시발은 언제부터 였는지요. 손의암선생의 측근자이신 이선생님께서….
이병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에 관한 기사가 난 직후로 기억합니다. 나는 천도교대종사 (교주비서실) 에서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암 손병희선생을 가까이 모셨습니다. 1월16일 의암선생이 오세창 권동진 최린씨를 불러 『천재일우의 때를 만났으니 주권회복운동을 벌이자』고 말씀한데서 만세운동은 비롯된 것으로 압니다. 오·권양씨가 절차에대해, 그리고 최린씨는 외부인사와 접촉하기 시작했읍니다. 25일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송진우교장 현상윤교감과 함께 의암선생이 첫 모의밀회를 갖고 이튿날 육당 최남선씨를 불러들여 본격화한 셈이지요.
사회 거사전에 이완용등 친일파와도 접촉하였다는 말이 있지않습니까.

<이완용에도 교섭>
이병 구한말의 대신급으로 한규설 박영효 윤용구 이완용에게 교섭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박영효에게 의암선생이 가실때 나도 함께 따라갔는데 그 뜻을 설명하니까 『일본이 헌법을 고치게 되니까 우리도 참정권을 갖게된다』 는 대답이어서 손선생님은 아무 말않고작별도 없이 나와버렸었죠.
이완용에게 그의 당질 이회구가 교섭 갈때도 함께 갔죠. 취지서를 보이니까 그는 받아들더니 검다희단 말없이 그걸 쥔채 안으로 들어가 쟎아요? 난 등에서 식은 땀이 났읍니다. 괜히 일 당하는구나.
그런데 「코피」를 들고 들어와 『합방조인에 도장찍은 내가 여기에 도장찍는 다고 누가믿겠느냐』면서 사양하더군요. 매국노지만 더 고발은하지 않았읍니다.
사회 그러면 민족대표 33인은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요.
이병 거족적인 운동을 벌이기위해 대중을 모으려면 종교단체를 규합 망라해야한다는 결론이 었읍니다.그때 김도태 현상윤씨가 동향인 오산학교 주비훈씨를 천거한 것으로 아는데 『재단관계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급히 상경하라』전보를 띄워 불러 올렸읍니다.그 무렵 기독교계의 태도는 일본에 독립청원서를 내자는 것이었고 또 자금도 없었나 봅니다.

<15인활약에 큰힘>
사회 최린씨가 이승훈씨에게 『김자성』 이란 명함 암호로 전달하면서 선언문으로 하도록 설득, 굳혔다는 얘기가 있던데….
이병 그렇죠. 평안eh의 기독교인은 그래서 이승훈 안세환양씨 도장을 거둬다 서명해왔어요.
그리고 불교계는 한용운씨가 백용성씨만을 데려왔기 때문에 두명참가하게 됐죠. 그러니까 천도교가 16명, 기독교가 15명.
사회 흔히 민족대표 33인이라고도 하는데 33인외의 15인의 직접활동이 오히려 컸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15인의 한분인 김선생께서-.
김지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에 실제 공이 컸던것도 역시 함태영 현상윤 양인이니까요. 실제로 운동한 것은 15인이거든요.
명신학교의 김도태는 황해도 연락책임을, 수원3·1학교의 김세환은 경기박의 연락을, 함태영은 민촉대표 유가족 부양을 맡았을 뿐더러 송진우는 중앙학교에서 이미 첫모의에 참가했고, 육당의 선언서 작성, 정노식이 자금댄 일등 큰일을 했읍니다.
정노식은 남강 이승훈의 여비를, 안세환 임규는 일본요로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진성사 인쇄소의 김홍규공장장은 목숨을 걸고 인쇄했거든요.
이경섭은 곡산에서, 강기덕·김원벽은 학생시위의 선도자였읍니다. 결국 이들 15인은 33인의 모의를 실행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사회 민족대표와 운동의 선두에 나섰던 학생들의 관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의 2·8선언과의 관계는 어떻하였는지요?

<모자속에 선언문>
이병 유학생 송계백이 방학때 모자속에 선언문을 넣고와서 최린선생을 만난일이 있죠.하지만 잘알겠다고 하고 이쪽 계획을 밝히지 않았읍니다.
이용 당시 나는 의전4학년이 었는데 「세브란스」 구내에 사는 함태영 이갑성목사와 자주 접촉했죠. 그리고 재경전문학교 학생들은 서로 통할수 있는 사람끼리 모여 학생이 주도해「데모」하기로 모의했읍니다.
김지 독립선언서는 원래 한용운씨와 최남선씨가 각각 써왔으나, 논의한 결과 육당 최남선의 것이 시의에 맞는 것이어서 이것을 채택하게 된 것으로 압니다. 여러 가지 사정때문에책임은 최린씨가 지기로 했으나 일본은 그날로 육당을 잡아갔던 겁니다.
이병 선언서작성을 육당에게 의임한 것은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결정된 겁니다. 다만 의암선생의 독립운동 3대원칙인 ①대중화 ②일원화 ③비폭력 무저항주의 방법의 바탕위에서 뼈는 그자리에서 세우고 육당이 살을 붙이기로 한 것입니다. 한용운씨는 육당이 기초한 것이 불만스러워 최린씨에게 자기가 쓰겠느라 했다고 알고있읍니다.
그러나 육당은 선언문을 기초해서 여러번 최린 오세창씨와 의논했고 의암선생한테도 3번이나 교정받았읍니다.
사회 6·25전 현상윤선생님 말씀이 최린선생이 어느곳 어느집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찾아오라 하기에 그 집에 갔더니 일본여인이 나오기에 깜짝 놀랐더니 그 여인이 태연하게 독립선언서를 가지러 왔는가하고 묻고 좀 기다리라 하면서 선언서를 내주더라는 것입니다.

<일녀손으로 전달>
김지 그렇다면 사실일 것입니다.
그 집은 임규씨 집으로 육당이 3일간 그곳에서 선언서를 지었는데, 임규는 전라도 익산사람으로 그당시 일어교사였고 일녀를데리고 살았습니다. 임규는 후에 도일하여 독립선언서를 일본귀중양원에 우송한 사람이지요.
이병 선언문은 육당이 자기가 경영하는 삼각동 신문관에서 손수 조판했답니다. 남을 시킬수없어서요. 그래가지고 2월25일 엿모판 밑에 숨겨 가위 두드리며 수송동의 보성사 (현조계사 앞마당에 있던 천도교운영 인쇄소)에 옮겨와 인쇄하는데 판이 안맞아 다시 짜는 등 법석을 떨었죠.
김홍규가 맡아 인쇄했는데 밤에가 보니까 「박상」 이 「박탈」 로 오자가 나서 육당에게 보였더니 무식한 짓이라고 펄쩍뜁니다. 『박탈은 우리 생존권이 뿌리는 남은 것이고 박상은 아주 없어졌다는 강조』 라는 것이라해서 고쳐 인쇄했읍니다.
사회 인쇄가 한창일때 고등계 한인형사 신철이가 들어와 발각되었는데 의암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돈뭉치를 그에게 전하여 위기를 모면했다지요.
이병 그것만이 아닙니다. 선언서를 가마니에 싸서 밤에 손수레에 싣고 천도교 본부까지 운반하는데 아슬아슬한 고비가 많았읍니다만 이웃 덕을 많이 봤습니다. 보국댁(민영훈)에 가는 것이라고 핑계해 겨우 모면했고, 그때 구내에 살던 이종일씨 집에 놓고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우선 보냈으니까요.
사회 독립선언서의 지방전달은 어떤방법으로 했읍니까.

<지방보낼때 탄로>
이병 그때 선언서의 지방전달 책임자는 평안도에 김상열, 함경도와 강원북부에 안상덕, 강원남부에 이동구, 경상도에 배세창, 충청도에 신태순, 전라도에 이종규등 이었읍니다. 그러던 이종규는 서울역부터 신의주행 기차를 타서 차표를 다시사서 보내는등 소동을 피우더니 끝내 조치원에서 일본관헌에게 그걸 뺏기고 돌아왔어요. 그것이 바로 하루전인 28일이었읍니다.
사회 일본검사문서를 보면 28일에 그네들은 이미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일역하였는데 그게아닐까요. 그선언서는 「조선」 이 「선조」로 오식되어있어요.
이환 그래서 이종규는 충북에 보내고 전라도에는 다시 정용근을 보냈읍니다. 그들은 모두 천도교 본부에 모여있는 의사원으로서 그들은 지방에서 온 상주연락원이었기 때문에 퍽 도움받은 셈입니다. 1915년이후 의암선생은 앞일을 내다보셨던지 이런 제도를 두었고, 지방교구에 속사판 (등사만) 까지 모무 분배해 줬었지요.
사회 만세 직전 여러분은 무얼하고 계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김지 나는 2월14일 오화영씨를 통해서 거사계획을 듣고 개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개성책임자로 임명돼 그곳에서 준비하면서 안사람에게도 내가 죽으면 수절할 생각말고 시집가서 잘살라고 유언까지 해놨었읍니다(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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