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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접 받을 바에야 … ” 이공계 설움 20년째 쳇바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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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호 10면

대전시 유성구 대덕연구단지의 야경. 연구단지에는 13개 정부출연연구소와 민간기업 연구소·대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연구원 수만 2만 명이 넘는다. 우수 인재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하면서 갈수록 활력을 잃고 있다. [중앙포토]

#1.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이 학과를 택했죠.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니 갈수록 힘겨웠어요. 공부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라 앞날이 안 보였죠. 앞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선배들을 만나보면 앞이 더 캄캄했습니다. 잠도 못 자고 끝없는 긴장 속에서 연구하는 쳇바퀴 생활이 계속 이어지더군요. 하지만 노력에 비해 받는 보수와 사회적 대우는 크게 못 미쳤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이공계 기피 현상, 이렇게 해결하라

장모(46)씨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지방의 명문공대 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이어 박사과정까지 입학했지만 1학기 만에 그만뒀다. 다시 대학입시를 치르고 한의대에 들어갔다.

#2. “학부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이 설득을 하셨어요. 이렇게 대학원 지원율이 낮을 때 공부를 계속하면 교수 되기도 쉽다고 하셨죠. 잠시 고민도 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털어내지 못했죠. 교수가 된다는 확실한 보장은 없어요. 기업에 들어가도 정년이나 보수 등 직업의 안정성이 떨어져요. 평생을 살아 갈 계획이 잘 세워지지 않는 거죠. 게다가 여성은 이공계 연구직에서 버티기가 더 힘들어요.”

KAIST 생명과를 졸업한 이모(여·24)씨는 끝내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수도권 대학의 한 의학전문대학원을 택했다.

우수 인재의 이공계 탈출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공대 대학원을 박차고 한의대에 들어간 장씨가 가졌던 고민과 문제점들이, 20여 년이 지난 후 이씨에게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장씨는 “20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공과 대학의 인기 하락으로 시작된 ‘이공계 위기’가 벌써 20여 년째다. 정부가 이공계 육성 투자를 한다지만 우수 학생들의 이공계 이탈 현상은 갈수록 심해진다. 기업들이 원하는 우수인력과 학생들이 원하는 직장 사이에 벌어지는 ‘미스매치(불일치)’ 현상도 심하다. 전문가들은 대학 등 교육 기관에 집중되는 지원을 ‘사람’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이공계를 택한 사람이 평생의 직업 전망을 보며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커리어 패스(career path)’를 열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KAIST 출신 의학계 진학 7년 새 3배
이공계 학생들이 느끼는 가장 큰 불안은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포항공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김모(27)씨는 졸업 후 서울의 한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물리학이 싫었던 게 아니다. 학부 고학년 때 연구실 선배들에게 ‘고생해서 박사 학위 받으면 뭐하나’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학교 시설이나 지원이 나쁜 게 아니라 막상 평생 직업으로 삼은 뒤 어떤 삶이 따라올지가 고민거리였다”고 말했다. 국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KAIST를 봐도 그렇다. 거의 모든 학생에게 장학금과 각종 혜택이 국비로 지급되지만 KAIST 학생들의 의·치학전문대학원 진학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5년 31명이었던 게 2012년 92명으로 세 배가 됐다. KAIST 외에 유명 공과대학들도 엇비슷하다.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민철구 선임연구위원은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3년 이내에 심각한 고급인력 부족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대학에 들어온 우수 인력이 연구직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우선 적절하고 충분한 보상체계가 없다는 점을 든다. 과학기술계·법조계·의료계·금융계 등 주요 직업군의 평생 소득과 직업 안정성을 연구해 온 민 위원은 “박사급 과학기술자의 평생 소득은 의료·법조계 종사자의 60% 수준에 불과하다”며 “소득은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과 비슷하지만 이들보다는 안정성이 크게 낮다”고 설명했다.

경제적 보상 외에 커리어 패스의 부재도 문제로 지적된다.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빠른 만큼 과학기술자의 직업적 미래는 근본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대학지원센터 황규희 소장의 말을 들어보자.
“고급 인력인 기술자들이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게 우리 현실이다. 경영·관리직으로 옮기는 일부를 뺀 대부분 기술직들이 50세가 넘으면 버티기 쉽지 않다. 외환위기 당시 현장 과학기술자들이 대거 쫓겨났던 경험이 트라우마처럼 이 분야 종사자들에게 남아 있다. 과학기술을 전공해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중장기적인 전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학과 기업 사이 미스매치도 심각
국민대 기계자동차공학과 졸업반 윤모(27)씨는 요즘 초조하게 입사 지원 결과를 기다린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지원했던 모든 회사에서 탈락했다. 올해는 닥치는 대로 25곳이나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지고 마지막 한 회사만 남았다.

이공계라고 다 취업이 잘되는 게 아니다. 전공과 선호 기업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채창균 박사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공계 학과의 취업률 자체는 큰 변화가 없지만 취업의 질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2008년 4년제 대졸자 취업률은 76.1%에서 2011년 79.1%로 상승했지만 정규직 취업 비율은 69.4%에서 59.7%로 크게 낮아졌다. 특히 물리·화학·생물학 등 자연계열 전공에서 두드러졌다.

졸업생들이 원하는 직장과 실제 취업률 사이의 미스매치 현상이다.

기업 입장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기업이 원하는 인력과 대학이 배출하는 인력의 역량에 차이가 나는 ‘스킬(skill) 미스매치’ 현상이다. 한국의 전체 대졸자 중 공대생 비율은 2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인 12%의 두 배 수준이지만, 기업들은 꼭 필요한 분야의 인력이 부족하고 졸업생들의 역량이 처진다며 불만이다.

한국공학교육인증원의 김성조(중앙대 컴퓨터공학과) 수석부원장은 “대학은 졸업생의 역량을 보증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개선하고, 기업도 필요로 하는 역량을 대학에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등 대학 교육에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제 기준에 맞는 교육을 보증하는 공과대학인증제는 올해로 시행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 공과대학 164개 중 절반 수준인 88개 대학만 인증을 받았다.

민철구 위원의 의견도 같다. 그는 “현재 이공계 인력들은 장기적인 수요 전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교육기관이 원하는 방향으로 배출되거나 방치되고 있다”고 말했다.

기초학문인 물리·화학·생물 등 자연계열의 부진은 특히 심각하다. 자연계열의 낮은 취업률과 불투명한 전망은 우수 인재의 진입을 막고, 이 분야의 국가경쟁력을 갉아먹는다.

동국대 물리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모(24)씨는 최근 기계공학으로 전과하는 것을 고민 중이다. 취업 때문이다. 박씨는 “대기업 입사를 준비할 때 공학계열은 우대를 받지만 물리학과는 찬밥 신세”라고 말했다.

황규희 소장은 “적어도 박사 이상 이공계 전문가라면 은퇴 시점까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며 “정부가 다양한 커리어 패스를 개발하고 지원해야 우수 인재의 이공계 탈출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민철구 선임연구위원은 “국·공립 대학부터 학과와 정원을 장기적 수요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며 “기초과학분야 인력에 대한 지원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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