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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공세 때 사투 … “전쟁 경험이 내 인생 바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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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호 14면

지난 5월 말 DMZ를 방문한 홀맨.

‘또 저 지겨운 나팔소리’. 1951년 4월, 중부전선인 강원도 화천. 17세 소년병 제임스 홀맨 이병은 다시 떨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부는 진격 나팔소리다. 하늘을 덮을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새카맣게 ‘중공군’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관총을 쏴도, 아무리 많이 쓰러뜨려도 적군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려왔다. 홀맨 이병도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미국 캔자스 출신 17세 소년 홀맨이 왜 듣도 보도 못한 나라 한국에서 총을 쏘고 있는가.

미 해병 1사단 7연대 1대대 소총수 제임스 홀맨 이병

홀맨은 해군 장교인 큰형이 너무 부러웠다. 빨리 형처럼 멋진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50년 초, 부모님 몰래 해병대에 입대지원서를 냈다. 16세 이하가 입대하려면 부모님 동의가 있어야 해 입대지원서엔 ‘17세’로 거짓 기록을 했다. 그렇게 해서 6월 23일 입대한 그는 이틀 뒤 한국이란 나라에 전쟁이 터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듬해 3월, 그는 한국행 수송선에 실렸다. 해병 1사단 7연대 1대대 소총수로 배치받아 강원도 인제에 도착한 게 4월 초. 보름 뒤 그는 6·25 사상 최대로 기록될 중공군 춘계공세를 막는 전투에 투입된다. 51년 4~5월 중공군은 강원도 인제·화천·양구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폈다. 자그마치 25만 명이 인해전술을 펼쳤다. 소년은 곧 전쟁의 실상은 새하얀 해군 제복이 아니라 자신 앞에 쌓여 가는 시체 더미에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

그 소년이 올해 79세 할아버지가 됐다.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부동산개발업으로 성공한 사업가다. 하지만 6·25의 기억은 극복하지 못한 상처다.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전쟁이 너무 끔찍해 40년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인터뷰 중간 전사한 전우들 이름을 얘기하면서는 목이 메어 말을 종종 멈춰야 했다.

홀맨은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전장 곳곳을 기록했다. 왼쪽 사진은 인제 인근에서 전우들과 함께한 사진. 맨 오른쪽이 홀맨이다. 오른쪽 사진은 펀치볼전투 참전을 위해 행군하다 촬영한 사진. ‘펀치볼까지 6마일(약 9.6km) 남았다’는 표지판이다. [사진 홀맨]

홀맨은 지금도 호루라기와 나팔소리에 몸서리친다. 그는 “중공군이 너무 많았어. 죽여도 죽여도 계속 밀려오는 거야. 시체가 너무 많이 쌓여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니까. 박격포·대포·따발총 할 것 없이 있는 무기는 다 동원해 막았는데도 그러는 거야. 그런 전투가 일주일간 이어졌지”라고 말했다.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대참패로 끝났다. 아군은 공세작전으로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춘계공세 뒤 51년 8~9월 홀맨은 동부전선 강원도 양구 해안(亥安) 분지에서 3주간 북한군과 공방전을 치렀다. 해안분지 지형이 펀치를 담는 우묵한 볼을 닮았다고 해 ‘펀치볼 전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 2799명을 사살하고 557명을 생포했다.

전쟁 도중 틈틈이 그가 찍은 사진엔 시체 더미 사이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전우들의 사진이 유독 많다. 부산행 배에서부터 친해진 전우들 중 데이비드 해치, 제임스 홀트케와 친했던 그는 전투 중 “해치가 총에 맞았다”는 고함소리를 들었다. 홀맨은 총을 쏘면서 계속 친구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소리쳐도 답이 없는 거야. 워낙 시체가 많아 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총알은 계속 핑핑 날아오고. 친구가 죽었다니 분이 복받쳐 더 미친 듯 공격했지.”

홀맨은 그의 삶에서 가장 혹독한 1년을 보낸 뒤 52년 4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6·25를 기록한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책 콜디스트 윈터처럼 추운 겨울에 대한 기억 때문에 지금도 사계절 모두 꼭 양말을 신어야 잠을 잘 수 있다.

전쟁의 경험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낮엔 돈을 벌려고 트럭을 몰았고 밤엔 야간 대학을 다녔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으니 대충 살 수가 없었지.” 부동산업으로 성공한 그는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딴 투자회사도 운영 중이다. “입대한 것에 후회는 없어. 참전 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내가 누리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았으니까. 무엇보다 난 살아서 이렇게 숨을 쉬고 있으니까.”

그리고 수소문 끝에 95년엔 해치도 찾았다. “(전투 당시) 내 목소리를 듣긴 했는데 총을 맞은 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더라고. 헬리콥터로 후송된 뒤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고…. 30년 넘게 쌓인 얘기는 많았지만 그저 서로 손만 꼭 잡아도 마음이 통했지.” 이후 이들은 종종 만나 6·25를 기념하는 모임을 갖는다.

홀맨은 지난달엔 6·25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5월 22~31일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판문점과 경기도 문산 등 비무장지대(DMZ) 일대를 둘러봤다. 그의 기억 속에 죽음만 널려 있던 척박한 땅은 푸른 생명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성한 게 없는 폐허였는데 이젠 나무가 우거지고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어. 여기가 전쟁을 치른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서울의 발전상은 더 놀라웠고. 번영의 토대를 만드는 데 우리가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게 자랑스러웠어.” 수십 년간 트라우마로 인해 한국 땅에 오지 못했던 그는 이젠 전우들과 한국 여행을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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