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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이 결혼식 기네스북에 올릴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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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철환
JTBC 대PD

상상들 해보기 바란다. 깊은 바다 밑, 동굴 속, 폭포수 아래서 하는 납량 결혼식, 하객 포함 전원 원시상태(누드)로 하는 에덴동산 결혼식. 그런 이벤트에 비하면 싱거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기록도 동네(?)기네스북 정도엔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이렇다. 지난 일요일 대학동기인 현정주의 딸 민지가 결혼을 했다. 정주는 내 삶의 전환점에서 확실하게 도움을 준 친구다. 방송사에 어떤 시험을 치고 들어가는지도 모르던 시절에 ‘넌 PD에 딱 어울리는 친구’라며 진로지도를 자청했다. 제대 직후 제2의 질풍노도 시절에 현역PD였던 그의 조언은 내게 한 줄기 빛, 응원의 함성 같았다.

 내년이면 입학 40주년인데 우리의 우정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숫자와 더불어 자라나는 중이다. 근무하던 방송사에서 정년을 마치고 제2의 인생을 ‘순항’ 중인 그가 어느 날 뜻밖의 부탁을 했다. “내 딸의 결혼식에 사회를 봐줄 수 있겠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주례가 아니고 사회? 내가 몇 살인데? “네가 31년 전 내 결혼식 사회를 봤잖아. 주례는 이미 잘 아는 교수님께 부탁을 해놓았거든. 그러니 네가 사회를 보면 왠지 즐거운 장면이 나올 것 같아서.” 일언지하에 나는 수락했다. ‘재미있게 살고 의미 있게 죽자’라는 내 좌우명에 어울리는 제안 아닌가. 기네스북 얘기는 웃음 뒤편에 내가 슬쩍 던졌다. 최고령 결혼식사회로 오르긴 약해 보이지만 2대에 걸친 동일한 사람의 결혼식 사회. 그건 좀 드문 일 아닐까.

 드디어 축복의 날. 주례는 낯익은 박동규 교수였다. TV에 자주 나오신 분이고 시인 박목월 선생의 장자로도 널리 알려진 분이다. 조곤조곤 자신이 겪은 일을 섞어가며 신랑신부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마치 상자 안에 든 선물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느낌. 가족이야기가 찡했다. 도시락을 안 가지고 등교한 날 어머님이 학교 수위실에 도시락을 맡기고 가셨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워서 찾으러 갔더니 저 멀리서 어머님이 안 가시고 여전히 길모퉁이에 서 계시더라는 이야기,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주례사는 ‘감사’라는 제목의 수필, 혹은 휴먼다큐 ‘사랑’의 소재로 손색이 없었다.

 광화문 교보문고는 서너 줄의 잠언을 외벽에 걸어두는 걸로 유명하다. 지금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일부가 행인의 시선을 붙잡는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정주가 사위에게 딸을 인계(?)하는 순간부터 ‘나였던 그 아이’의 심장에선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31년 전 장인에게 아내를 인수받던 젊은이가 낯선 청년에게 딸을 넘겨줄 때의 심정은 어떨까. 세월의 무심함과 정직함에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이름 그대로 꽃다웠던 김국향 아나운서(정주 아내)는 점잖은 아주머니로 분장한 채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에 축가가 빠질 수 없다. 첫 번째 축가는 ‘불멸의 사랑’(A love until the end of time). 문득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제목이 생각났다. ‘세계의 끝’(The end of the world). 스키터 데이비스가 부른 동명의 노래도 있다. 사랑이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는 노래. 정말 그럴까. 우리가 청춘의 시절 찾아 헤매던 사랑은 이른바 끝내주는 사랑(top of the world) 아니던가. 맞다. 최고의 순간에서 최후의 순간을 예감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모두 앞에서 확인받는 순간. 그것이 결혼식의 진정한 의미 아닐까.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운명과는 등질 필요도, 대들 필요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굽실거릴 이유도 없다. 그저 친구처럼 지내면 좋다. 운명이 대단한 존재인데 그의 도량과 눈썰미를 의심해서야 되겠는가. 대립하거나 복종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다. 그러면 운명이 결국은 선물을 준다. 오늘 이 순간도 결국은 운명이 준비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그날 결혼식장엔 꽃밭도 보이고 바다냄새도 물씬했다. 웃음꽃이 만발하니 꽃밭이고, 모녀의 울음이 터져 나오니 눈물바다였다. 강한 여자로 보였던 국향의 눈 주위도 슬며시 젖어 있었다. 신부 때 흘렸던 눈물과 지금 신부의 어머니가 되어 흘리는 눈물. 그 안엔 자신을 키운 어머니도 녹아 있겠지. 멀리서 보니 그녀가 입은 한복에 소쩍새가 날아다닌다. 옛날엔 국향이 촌스럽던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꽤나 어울린다.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