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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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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노인『(혼자 감탄) 참말로 이장양반 똑똑하지! 우리야 어찌 저 태극기를 그리 내겠소?』
할멈『(걸어나와서) 이걸 어데 달지요?』
이노인『거기 삽짝 오른편 나무 가지에 매달아 봐요!』
할멈이 노인이 가리키는대로 나지막한 잡목가지에 서투르게 태극기를 매단다.
그와 동시, 옹달샘 뒷길로 피투성이 인민군 복장을 한 구식을 들쳐업고 분이 (26세) 등장, 그 뒤에 꼬리처럼 전호가 따라온다. 분이『어머니!』
할멈『(돌아보고 놀라)아니 얘야?』
이노인『(역시 놀라서) 분아! 게 누곤?』
분이『구식 도련님이어요!』
할멈 부리나케 달려간다. 분이 살편상 의에 구식을 뉜다. 인민군 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지자 전호 얼른 주워 체 머리에 덮는다. 할멈 피가 엉겨 붙은 구식의 얼굴을 들고 한참 지켜 보다가
할멈『(목이 쉰듯) 구식아! 구식아!』
이노인 『(일부러 침착하게) 분아! 어찌된 일이고?』
분이『…굴속에서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릴 들었어요. 도련님 목소리 같길래 찾아 다녔더니…쓰러져서 억지로 기어오다가 이렇게 기절해 있었어요!』
바람이 분다. 가늘게 펄럭이는 태극기를 전호 이상한 듯 눈여겨본다.
할멈 『구식아! 구식아!』
이노인 구식의 손목을 집어 진맥.
이느인 『사돈댁 아직 맥이 뛰고 있옹깨 얼릉 깨나게 해야지요! 분아! 찬물을 떠 오너라!』
분이 옹달샘에 퓌어 갔다가 바가지에 물을 떠온다.
할멈『죽일놈들! 멀쩡한 사람을 끌고 갔다가 이 지경을 만들다니….』
이노인 분이가 건네는 찬물을 받아 한 모금씩 구식 얼굴에 뿜는다. 전호 이번에는 신기한듯 지켜본다.
할멈『구식아! 구식아!』
이노인『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
한동안 숨가쁜 침묵 속에 모든 시선이 구식을 주시한다.
…구식의 가슴에 파동이 일고 의식을 찾아 눈을 뜬다.
할멈『구구식아!』
분이『도련님!』
구식 무슨 말을 하려고 손을 들어 허우적거린다.
분이『도련님! 도련님!』
이노인『(구식을 가로 안아 일어서며) 방에 눕혀야겠어! 피를 이렇게 많이 흘렸으니… (방으로 구식을 운반하고 뜰에 서며) 사돈댁! 정신을 차려요! 빨리 미음이라도 한그릇 끓여야지요!』
전호『(멍하게 앉은 할멈에게) 할매! 삼춘 총 맞았어?』
할멈『………』
전호『누가 삼춘한테 총 놨노』
분이 전호를 꼬옥 껴안으며『전호야! 그런말 하지말고 있어!』
전호『왜 하면 안돼』
이노인『발돌아! 너는 그냥 있어야 해!』
전호『외할부지! 그거 알아주마 안돼?』
이노인『우리도 몰라 그런다!』
방에서 구식 기어 나와 문턱에 엎어져서 『물 물…… 물좀….』
분이 다시 바가지를 집어 든다.
이노인『안돼! 분아! 물을 먹이마 죽는다 죽어!』
구식『어어머니! 물….』
이노인 『분아! 어서 미음을 끓이래두!』
비로소 할멈의 목이 터져 통곡한다.
이노인『사사돈댁! 정신을 채려서 살려놓고 봐야지오!』
분이『아버지! 쌀이라곤 한 알도 없어요.』
구식『어어머니, 동무물…』
이노인『서숙도 없나?』
할멈『(울음을 딱 그치곤 없어! 아무것도 없어!』
전호『할매! 삼춘 감자 삶아 주지 뭐… 삼춘 감자 잘 먹는다!』
할멈『…이년만에 돌아온 자식 밈 한그릇 못 끓여주고….』
이노인『분아! 너 빨리 우리 집에 가봐라! 우리도 쌀은 없지만 서숙은 있을끼다!』
전호『오매! 그라마 가자! (치를 당기며) 얼릉가자!』
구식『(고개를 애써 처들고 어머니 동무! 물 물좀‥.』
이노인『여보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세! (구식을 반듯이 뉜다)』
전호『오매! 뭐하노? 빨리 외갓집에 가자!』
분이 한숨을 짓고 전호를 이끌고 오른편 길로 퇴장.
이노인 지갑을 꺼내어 푸석한 염초를 종이에 맡아 화롯불에 불을 붙여 할멈에게 내민다.
『자! 사돈댁! 이런땔수록 굳게 마음을 가져야지요!』
할멈『고맙소! (담배를 받아 두어 모금 빨아 마신다) 』
무대 약간 어두워진다. 말이 끊기는 동안 우수수 바람소리에 태극기 펄럭이고. 별안간 산 넘어 에서 소총소리 한방 들린다. 할멈과 이노인 불안한 표정을 마주 대한다. 연이어 계속 들리는 총성에 놀란듯 벌떡 구식 일어선다. 한쪽 다리가 부상을 입어 벽에 몸을 붙이고.
『총… 총을… 동무 총을….』
할멈『(쫓아 구식을 잡으며) 구식아!』
구식『나 나 싸우러 가야지! 인 인민을 해방시켜야!』
이느인『(다가서서) 여보게! 인민이고 뭐고 자네 이꼴로‥.』
구식『(몸부림치며) 인민을… 부불쌍한 인민을….』
이노인『(측은하게)여보게 불쌍하긴 누가 불쌍한가? 자네가 젤 불쌍하지.』
구식『아! 목이 목이 탄다. 물…』
이노인『(애써 구식을 가로막으며)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게!』
구식 『아…! 목이 탄다. 어머니…동무 물을 물을 주시오!』
이노인『이봐! 참아야 한다니깨, 자넨 피를 많이 쏟았어!』
구식『피를 쏟다니? (피투성이 두 손을 내려보고) 피다! 피야!…총 총을 총이 있어야 돼! (기진맥진 쓰러져 버린다)』
오른편 숲에서 살금살금 석팔이가 등장, 태극기롤 보고 더욱 놀라 바짝 할멈에게 다가서서 한손으로 태극기롤 가리키며 열심히 그리고 괴로운 표정으로 무슨 뜻을 전한다. 이노인과 할멈 의아한 표정으로 석팔을 본다. 석팔 더욱 간곡히 태극기를 가리키면서 계속 아비 베 등의 단말마적 탄성을 발한다.
이노인『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e 』
석팔 태극기를 가리키면서 더욱 답답한 듯 내리라는 뜻이며 산너머를 가리키고 목베는 시늉 등을 거듭한다.
이노인『석팔아! 태극기를 내리란 말이가?』
석팔 그렇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할멈『사돈! 혹시 인민군이 또 쳐들어온 모양이지요?』
이노인 『듣고 보니 방금 총소리는 따발총 소리 같았는데….』
석팔 휘휘 들러보다가 구식을 발견 아-「하고 비명을 지르며 풀석 구식이가 있는 방문을 닫아버리고 공포에 질려 옹달샘 쪽으로 뺑소니 쳐 퇴장.
이노인『도무지 알 수 없어! 분이는 또 여태꺼정 뭘하노….』
할멈『우선 저 태극기부터 내립시다!』
이노인『그게 좋겠군요!』
할멈 삽짝으로 걸어 나온다.
따발총을 겨눈 인민군A·B 왼편 숲에서 불시에 등장.
깜짝 놀란 할멈과 이노인 엉겁결에 전신을 떨면서 두 팔을 쳐든다. 인민군B 어느 결에 오른편 싸리 울타리 사이로 은폐하여 총구만 겨눈다.
인민군A『역시 반동이다!』
이노인『예? 바반동이라고요? 우우리 그런거 없읍니다!』
인민군A『무스기 소릴! 손들고 이리 갈이 서라!』
이노인 할멈 곁에 선다.
인민군A『방에는 아무도 없나?』
할멈『예…저저…』
인민군A『거짓말하면 총살이다!』
동시 인민군B의 총구에서 집안을 향하여 두어발 발사.
인민군A『꿇어앉아라!』
이노인과 할멈 잠시후 꿇어앉는다.
인민군A『음-. 저 기는 누가 달았지?』
이노인『저저…저….』
인민군A『왜 맡을 모하나?』
할멈『여여봐요! 우린 아무 죄도 없읍니다!』
인민군A『아무 죄가 없다? 흐흐흐…이거봐! 동무들은 철저한 반동이다. 우리는 동무들을 해방하려고 무수한 피를 인민해방전선에서 뿌렸다이!』
이노인『해해방? 그러니 우리를 살려 주시오!』
인민군A『흠! 우리 인민군대는 강하다이! 동무들은 남반부 괴뢰군을 기다리고 있지만 놈들은 절대로 못 온다.』
이노인『여여보시오! 젊은 양반!』
인미군A『잔소리가 많다!』
정확하게 거총한다. 무자비한 바로 그 순간-. 큰방 문이 와락 열리고-
구식『(억지로 일어선 채) 동무! 잠깐만.』
인민군A『(구식을 보다가 알아본 듯 층을 내리고 응, 구식 동무! 나 그럴 줄 알았지!』
구식『동무! (할멈과 이노인을 가리키며) 반동이 아니다. 내 어머니 동무다!』
인민군A 『어머니 동무라고? (잔인하고 비열한 웃음을 웃는다) 흐흐흐….』
구식『더동무…… 살려야 한다! 죄…없는 인민 동무를… 그리고 나도 살고 싶다. 소소좌 동무는 잘 있소?』
인민군A『 (찢어지는 목소리로) 동무도 반동이다!』
구식『뭐 뭣이?』
인민군A『동무는 혁명대열에서 이탈한 철저한 반동이다!』
구식 『내가… 바 반동이라고· 아-니다. 동무는 알잖나? 함께 인민 해방전선에서 싸우던… 나 난 부부상을 당해 낙오가 되어…. 』
인민군A『거짓말 마라! 우리 두 인민군은 소좌 동무의 신성한 명을 받고 동무를 처디하러 왔다.
(구식 심한 회의에 빠진다) …그리고 여긴 철저한 반동가족! 동무의 형은 남반부 괴뢰군 이다!
할멈『그 그건!』
인민군A『잔소리! 이 근방 모든 반동가족은 모조리 처단하기로 신성한 대좌동무의 명령이 내렸다.… 우리인민 해방 군대의 은혜를 잊고 남반부 괴뢰군과 미제국주의를 기다리는 철저한 반동가족들이었다!』
구식『(힘없이)…동무…그런게 아니오.』
순간 인민군B의 총구에서 불이 뿜는다.
구식 『어머니 뭍 물 물…. (문턱에 푹 꼬꾸라진다)』
할멈 휙 돌아보다가 와락 달려가면서『구식아.』
다시 인민군 B의 총구가 불을 뿜고 할멈 살평상에 푹 엎어진다.
이노인『(손을 내리고 이를 갈며)이 고약한 놈들… 불효… 막심한…에잇! (달려 들려한다) 』
인민군A『흐흐흣…! 동무도 죽어 마땅하다이! (방아쇠를 당긴다)』
이노인『(피 솟구치는 흉부를 움켜잡으며) 아! 너거들 천벌을 받는다!』
지축을 뒤흔들며 비행기의 폭음이 들린다. B29의 편대다. 인민군A·B 반사적으로 몸을 숨긴다. 한동안 침묵-.
이윽고 비행기의 폭음이 멀어지고 멀리서 폭탄 터지는 소리와 고사포 터지는 소리들….
인민군B『(일어서면서) 동무! 빨리 갑시다래… 이제 임무는 마쳤시니….』
인민군A『그렇다이! 한 노무 새끼도 남지 않고 다 뒤졌으니까…. 』함께 오른편 숲속으로 퇴장.
바람이 불고 어두워지는 무대에 흥건히 피와 시체만 남고 비장한 음악-.
옹달샘 뒷길로 망태에 가득 옥수수를 담은 최노인이 등장 미처 무대 중앙을 보지 못한채…『할멈… 난리통에도 옥수수는 잘 익었어!』
어느새 왔었던지 집 모퉁이에 바싹 붙어 서있던 석팔, 최노인 앞에 나선다.
최노인『이놈 누고? 허허 이 귀머거리 석팔이가 우얀 일이고』 석팔 무대 중앙을 가리킨다. 촤노인 섬뜩하여 천천히 걸어 살평상 앞으로 온다.
석팔 뒤따라 와서 우뚝 선다. 최노인 망태를 던지고 할멈의 시체를 점검. 그리고 구식의 시체를 점검, 그리고 이노인의 시체까지 점검한다. 최노인의 손도 흥건히 파에 젖는다. 최노인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다. 차츰 그의 표정이 이그러지고 시선에서 광기 빛난다.
최노인『누고? 누고? (석팔에게 달려가서 멱살을 움켜쥐고 누고? 누가 이랬노? 누가 누가?』
석팔 아 아 비 베 괴성을 지른다.
최노인『이놈 너는 벙어리지? (석팔의 멱살을 놓고 외쳐) 아무도 없나? 아무도 없어?』
핏빛 절규라고나 할까? 최노인 점차 광기 더하여 이제 아주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최노인『(무수히 반복하여) 누가? 누가 누가… 누가 이랬소? 누가 할멈을 죽있노? 누가 구식이를 죽있노? 누가 누가 누가 이랬노?』
석팔 우선 태극기를 가리킨다. 최노인 우르르 태극기를 찾아 달려간다. 석팔 달려와서 가로막으며 이번엔 구식이를 가리킨다. 최노인 우르르 구식에게 달려간다. 석팔 이번엔 또 부정한다. 열심히 그리고 열렬히 자기 딴엔 무어라 설명하지만 안타까울 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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