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미셸 쇤베르그(69). 전세계 1억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 작곡가다. 세기의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미스사이공’이 그의 손에 의해 빚어졌다. 두 작품 공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작이지만, 가슴을 적시는 아름다운 선율이 있었기에 30년 가까이 장수할 수 있었다.
12일 영국 런던에 있는 ‘레미제라블’ 오리지널 제작사(CML) 사무실에서 쇤베르그를 만났다. 일흔을 눈앞에 둔 노령의 예술가는 부드럽지만 예리했다. 온화하면서도 또렷하게 자신의 견해를 전달했다. 그는 ‘오페라의 유령’ ‘캣츠’의 앤드류 로이드 웨버(65)와 더불어 세계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꼽힌다.
-1985년 초연된 ‘레미제라블’이 지금까지 롱런 중이다.
“런던에선 85년 처음 공연됐지만 난 78년에 이 작품을 썼고, 프랑스에선 80년에 초연됐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빅토르 위고 원작의 힘이다. 소설 자체가 무엇을 넣고 뺄 게 없이, 완벽함 그 자체였다. 책을 읽는 와중 그 갈피에서 난 리듬·화음·세기 등을 감지했고, 다 읽고 나선 마치 한편의 거대한 오페라를 본 듯한 감흥을 느꼈다. 어쩌면 난 소설에 숨어 있는 음악성을 그대로 악보로 옮겨 놓는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원작을 능가하는 가공은 없다.”
-작품에 있는 ‘I Dreamed a Dream’ ‘On my Own’ 등은 노래 자체로 너무 애절하다.
“아름다운 곡을 쓰기 위해 특별히 공을 들이진 않는다. 난 그저 대본에 충실했을 뿐이다. 노래가 듣기 좋았다면 그건 그 지점에, 그 상황에 적합한 선율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난 작곡이 잘 안 될 때면 대본을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섣불리 재주를 피워선 안 된다. 모든 것의 답은 기본에 있다. 기초가 튼실해야 변용이 가능하고 상상력이 발휘되며 창의성도 나온다.”
-‘레미제라블’ 새 버전(version)이 2010년부터 공연되고 있다.
“25주년에 맞춰 초창기 회전무대 대신 영상을 많이 활용한 새 공연이 탄생했다. 무대 예술도 박제화되면 안 된다. 근간은 유지한 채 세상의 변화와 관객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그런 능동성이라면 ‘레미제라블’ 100주년 공연도 성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난해 영화로도 크게 성공했다.
“처음엔 그저 노래 한두 곡 삽입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 작업이 원작 뮤지컬을 그대로 재현하고, 음악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내 역할도 점점 더 커졌다. 꼬박 18개월을 매달렸다. 무엇보다 예술이란 ‘혼자’가 아닌 ‘여럿’에 의한 협력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러셀 크로와 앤 헤서웨이와 같은 배우가 왜 스타인지도 알게 됐다.”
헝가리 출신인 쇤베르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로 이민 왔다. 피아노 조율사였던 아버지 덕에 그는 일찍이 음악에 눈을 떴다. 다섯 살 때 오페라 전곡을 외울 만큼 재능도 뛰어났다. 대학에선 수학을 전공했는데, 록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오페라·발레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뮤지컬 작업을 해왔다.
“그건 내게도 미스터리다.(웃음) 난 네 살 때부터 오페라 작곡가를 꿈꿨지만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에 탐닉하고, 스티브 원더와 레이 찰스를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내 음악에 가장 영향을 끼친 건 자크 오펜바흐(1800년대 활동한 프랑스 희극의 창시자)지만 난 지금도 레이디 가가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좋아한다. 클래식과 팝의 경계를 두지 않았던 게 내 음악적 자양분이 아닐까 싶다.”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의 대본·가사는 모두 알랭 부브릴이 썼다.
“알랭 부브릴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어느새 45년이 됐다. 그를 만나면서 내 음악은 날개를 달게 됐다. 어떤 대본을 보며 상상하는 장면에서 그와 나는 정확히 일치하곤 했다. 우린 서로 말이 필요 없는 형제다. 이토록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레미제라블’ 한국 공연도 성공적이다.
“얼마 전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레미제라블’이 많은 부문을 수상했다는 소식 들었다. 축하 공연 동영상도 보았는데, 정성화의 노래는 역시 뛰어났다. 오디션 때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던 것을 확인해 반가웠다.”
런던=최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