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차 투표 과반 압승 이변 … 이란 새 대통령 하산 로하니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란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중도파 성직자 하산 로하니가 지난 14일 수도 테헤란에서 대선 투표를 마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최종 개표 결과는 10일 안에 헌법수호위원회의 추인을 받아 최종 확정되며, 로하니는 8월 3일 임기 4년(중임 가능)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테헤란=게티이미지]

2013년 6월 16일 세계 무대의 주인공은 이 남자다.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공습으로 시작되는 또 한 차례의 중동 전쟁의 위험, 시리아를 사이에 둔 서방 국가와 러시아·이란의 대립, 그리고 한국과 같은 무역 중심 국가를 괴롭히는 이란 시장 위축 등 국제사회의 난제들에 대한 해결의 기대가 그에게 한껏 쏠렸다. 하산 로하니(65) 이란국가지도자운영회의(최고지도자 선임·해임권을 가진 이슬람 성직자 단체) 위원,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낙선이 예상되는 들러리 후보로 여겨졌던 그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과반(50.7%) 득표로 결선 없이 곧바로 당선이 확정되는 대이변을 낳았다. 수도 테헤란 거리에는 개혁·개방을 바라는 축하 인파가 쏟아져 나왔고, 서방 세계는 이 나라의 변화를 고대하며 일제히 환영을 표시했다.

대반전의 조짐은 투표일인 14일 저녁(현지시간) 투표소에서 나타났다.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투표 마감 시간이 세 차례에 걸쳐 총 5시간 연장됐다. 투표를 보이콧하겠다던 야권 성향의 대학생과 도시 중산층 유권자들이 몰려 나왔다. 투표율은 예상을 크게 초과한 72%였다.

대학생·중산층 막판 투표소 몰려 나와

 투표 4일 전 중도파의 거두인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와 개혁파 정치인 무함마드 하타미, 두 전직 대통령은 로하니 지지를 선언했다. 비슷한 시점에 8명의 대선 후보군에서 유일한 개혁파였던 무함마드 레자 아레프가 사퇴했다. 중도·개혁 세력이 로하니로 후보를 단일화한 것이다. 라프산자니는 직접 출마했다가 혁명수호위원회의 후보 검증 과정에서 탈락했고, 그의 출마 좌절은 민심을 자극했다.

 로하니는 2000년까지 20년간 이란 의회(마즈리스) 의원으로 활동하며 국방·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정치적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단일화의 파괴력은 컸다. 유력 후보였던 보수파 무함마드 바케르 갈리바프 테헤란 시장과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의 측근인 사이드 잘릴리는 각각 16.6%와 11.4%의 표를 얻는 데 그쳤다.

 로하니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의 경제제재 완화 또는 해결을 공언했다. 핵협상에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란은 최근 2년 새 40%가 넘는 물가 상승과 50% 이상의 통화 가치 하락으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수입 물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들은 경제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를 로하니 승리의 핵심 동력으로 꼽았다. 서방의 경제제재가 정치적 새바람을 불러온 셈이다. 그는 대선 TV토론에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다. 인터넷과 언론 자유 보장도 얘기했다. 선거 결과 발표 직후 수천 명이 테헤란 거리로 나와 축제를 벌였다. BBC방송에 따르면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청년이 많았다.

미, 핵문제 해결 기대감 “환영” 성명

 미국은 즉각 환영을 표했다. 백악관 제이 카니 대변인은 15일(현지시간) “이란인들이 목소리를 낸 이번 대선 결과를 존중한다”면서 최대 현안인 핵개발 문제와 관련, “외교적 해결에 기꺼이 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영국·프랑스 외교부도 환영 성명을 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의 대서방 강경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 달라는 주문이었다. 8월 3일에 취임하는 로하니는 당선 발표 직후 “오늘의 승리는 극단주의에 대한 지혜와 온건함, 그리고 성숙의 승리”라고 말하며 개혁·개방에 대한 이란 안팎의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에게는 이란과 국제사회의 핵협상을 원만하게 매듭지은 경력이 있다. 최고국가안보위원회(SNSC)의 제1 서기였던 그는 2003년 10월 영국·프랑스·독일 3국과의 핵협상 대표가 됐다. 전 해에 프랑스에 활동하던 이란의 반정부 단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하지 않은 이란 핵시설들을 폭로해 미국의 공습 가능성까지 거론되던 시점이었다.

 로하니는 2004년 6월 IAEA와의 추가 협정 체결과 우라늄 농축 중단을 약속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논의를 피했다. 대신 핵의 평화적 사용에 대한 권한을 보장받았다. 미국과의 정면 충돌 국면에서 벗어나면서 IAEA의 허용 범위 내에서의 핵개발은 용인받는 타협안이었다. 그는 “온건하고 사교적”(잭 스트로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서방 언론은 ‘외교의 셰이크(왕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2005년 6월 대선에서 온건 개혁파인 무함마드 하타미가 강경파 아마디네자드에게 대통령 자리를 빼앗기면서 로하니는 16년간 맡았던 SNSC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마디네자드가 그의 핵협상을 ‘굴욕’이라고 비난한 데 따른 일이었다. 로하니는 선거 운동 때 “제재를 피하면서 핵기술은 축적할 수 있는 성공한 외교였다”고 주장했다.

“하메네이가 실권 … 지나친 기대 성급”

 이란 전문가들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실권을 장악한 이란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크지 않다는 점을 들어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도 개혁·개방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에 힘입은 점진적 변화는 예상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이란 연구 책임자인 압바스 밀라니 교수는 CNN방송에서 “로하니가 대놓고 하메네이를 비판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분명히 핵 문제 등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948년 테헤란 인근인 소르케 지역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로하니는 청소년기에 수도원에 들어가 이슬람 성직자의 길을 밟은 뒤 10대 후반부터 이란 왕정에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다. 왕정 비판 연설 때문에 비밀 경찰의 추적을 받자 70년대 후반 유럽으로 도피해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혁명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 지지 세력에 가담해 혁명 공신이 됐다.

 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뒤 의회에 진출해 이란 국방 조직 개편에 기여했다. 최고군사위원회 위원, 공군사령관 등을 거쳐 합참 부의장까지 지냈다.

영국 유학 … 6개 국어로 소통 가능

 72년 테헤란대를 졸업(법학 전공)한 그는 99년 영국 글래스고의 칼레도니안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학력을 밝혔다. 그러나 허핑턴포스트 등 외신은 영국에서 공부한 것은 70년대 후반이고, 이후에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보도했다.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뿐 아니라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아랍어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9년 결혼해 4남매를 낳았으나 큰아들은 92년 자살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하산 로하니 당선자 말말말

“ 오늘의 승리는 극단주의에 대한 지혜와 온건함, 성숙의 승리다. 나는 모든 온건파, 개혁주의자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따뜻하게 악수했다”(6월 15일, 대선 승리 직후)

“ 이란과 미국의 사이에는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가 있다. 하지만 서로 선의와 존중을 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적대와 불신을 줄여나가는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6월 13일, 언론 인터뷰에서)

“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국가의 중용을 되찾는 것이다. 우리는 극단주의 때문에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6월 12일, 언론 인터뷰에서)

“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의 분산이다. ”(6월 5일, TV 대선 토론에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