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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음악’ 결사 반대 … 음반 취입 거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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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27면

1945년 베를린 필하모니와 리허설을 하는 첼리비다케. 베를린 필의 지휘봉은 1955년 카라얀에게 넘어갔다. [AP]

아마도 어릴 적 환상의 연장일 것이다. 기인에 대한 호기심이 늘 있어 왔다. 일찍이 시에 눈을 떴을 때 ‘대한민국 김관식’이라는 명함을 갖고 다녔다는 전설이 흥미로워 그의 시집 다시 광야에를 열독했는데 예상보다 기벽스러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문단 3괴로 불리는 인물 가운데 나머지 두 분 박봉우, 천상병 선생도 생전에 만나봤지만 정신병력의 흔적이 너무 뚜렷했다.

[詩人의 음악 읽기] 옹고집 지휘자 첼리비다케<상>

시인 고은의 그 유명한 주벽도 친구 누나와의 인연을 통해 어린 나이에 여러 차례 목격했는데, 내가 성인이 되고 시인 끄트머리에 서 있을 때 그분은 이미 장엄한 지사풍으로 변모해 있었다. 방송활동의 대부분을 인터뷰로 보냈다. 문화계 별별 화제의 주인공을 다 만나봤지만 기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니 그 많던 기인은 다 어디로 갔을까?

특출하게 재능이 뛰어나거나 특출하게 대책 없는 루저는 많았다(왜 내 주변에는 재능 있는 인생 루저가 유달리 많을까). 하지만 가령 ‘차원에 저항’한다거나 외계인적 상상력을 펼친다거나 엄청나게 설득력 있는 망상의 소지자 따위는 없었다. 왜 그럴까. 기인 유전자가 멸종한 것일까. 간혹 기인의 맹아를 품은 자들을 만나본 적은 있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기인부재는 아무리 봐도 시대환경 탓이다. 기인을 용납할 수 없는 꽉 막히고 타산적이고 공리주의적이며 탄력 없는 사회 공기. 그것은 1980년대 이후 세계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전 인류를 거대한 시장의 소매상인으로 귀속시킨 레이건과 대처의 신보수주의 등장 이래 사람들은 이상도 망상도 다 잃은 쪼그라든 잔챙이로 전락해 버렸다.

기인은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 낭만주의가 언제 적인고 하면… 그냥 옛날이라고 말해야겠다. 히피와 6·8혁명이 있던 1960년대를 최정점으로 해서 우리가 옛날로 통칭해 부르는 시절에 막을 수 없는 집단적 에너지 분출이 있었다. 신성으로부터의 이탈, 혁명의 기운, 모럴의 해방, 그런 과정에 지긋지긋하면서 괴벽스럽고 애틋한 각종 낭만주의, 낭만주의자가 존재했다. 그들이 내가 생각하는 기인이다.

젊은 시절의 카라얀. [중앙포토]

음악계에서라면 가령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어떨까. 선병질의 결벽증 환자이자 은둔자였던 그의 삶이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실은 과잉이라는 관점에서 낭만주의자이며 기인인 것이 맞다. 그는 지루해 마지않던 바흐 건반음악을 아크로바틱한 기교물로 전환시켰고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신비감이 깃든 열광을 보였다. 대중경멸을 예찬하는 대중의 아이러니, 바로 그것이다.

선병질의 굴드를 낭만주의적 기인 반열에 놓는 발상에 준해서 또 다른 못 말리는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이번에는 똥고집, 쇠고집, 왕고집의 제왕이다. 언터처블의 대책 없는 안하무인, 그러나 존경하며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음악성. 그 인물이 바로 지휘자 첼리비다케다. 아무리 음악에 문외한이라도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는 다른 모든 여가수의 것과 구별해 낼 수 있다. 워낙 특이한 발성인 탓이다. 첼리비다케의 지휘가 바로 그렇다. 워낙 느리게 연주하기 때문이다. 거장 오토 클렘페러도 꽤나 느린 지휘를 했지만 첼리비다케는 정도를 넘어선다. 그 느림의 속도는 평소 알던 곡을 아주 다른 느낌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어떤 곡이라도 그의 손길을 거치면 심각하고 비장한 분위기로 돌변해 자세를 바로 하게 된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첼리비다케는 루마니아 출신이다. ‘첼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의 이름을 들어보았거나 음반을 접했다면 이미 클래식 음악 동네의 내밀한 후원의 정경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만큼 대중성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1912년생으로 96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살아서 신화가 되었다. 그 이유가 음악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일 음악계의 산맥 같은 존재인 푸르트뱅글러 후임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카라얀에게 밀려난다.

그 정도로 일급의 지휘자라는데 오랜 세월 동안 도무지 음반을 찾아볼 길이 없었다. 베를린 필 재직 당시 단원들의 술회가 가관이다. 단원들은 젊은 첼리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연습량을 요구하며 악마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의 음악성을 부정하거나 폄하하지 못했다.

베를린 필에서 밀려난 이후 장장 25년간 유럽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떠돌았다. 그의 나이 일흔 살이 되어서야 뮌헨 필하모니 지휘봉을 잡고 종년까지 안착하게 되는데 유명한 고집이 있었다. 통조림 음악이라며 레코드 취입을 한사코 거부한 것이다. 음악이 비즈니스 영역으로 접어든 지 오래인 환경에서 음반취입을 거부하고 라이브 연주만 고집한다면 그 교향악단의 존립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악단과 뮌헨시민들은 그를 존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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