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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멋진 스파이를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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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몇 달 전 영국 일간지에 일제히 특이한 전면 광고가 실렸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라는 제목하에 450여 단어가 작은 활자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죽 읽어 내려가야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아챌 수 있는 일종의 ‘티저’ 광고였다. ‘우리는 당신의 성별이나 출신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만 흥미가 있다’ ‘우리는 국익을 지켜내는 일의 위대함을 믿는 이를 원한다’ 등의 매력적인 문장이 있었다. 영국 해외정보국(MI6)의 구인광고였다.

 그 끝에는 ‘지원을 고려할 때 당신은 친구나 가족과 상의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하기도 전에 망치는 일이 된다. 의논하고 싶다면 그 누구도 아닌 우리와 하라’는 경고문이 있었다. 청년들이 한 번쯤 품을 법한 ‘스파이에 대한 동경심’을 한껏 자극하는 세련된 광고였다.

 MI6 요원들 모두 자신의 신분을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숨기면서 사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007’ 영화에서 주인공 미스터 본드의 가족이나 친구가 등장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기는 하다. 3년 전 개러스 윌리엄스라는 MI6 직원이 런던의 집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을 때 친구나 이웃이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MI6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더욱 알 수가 없다. ‘살인면허’를 가진 본드는 세계를 누비면서 온갖 악의 무리들을 소탕하고 다니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최근 수년 내에 영국 언론이 보도한 MI6의 공적 중 하나는 리비아 내전 때 카다피와 그의 아들들을 추적해 시민군에 소재를 알려줬다는 것인데, MI6는 이를 부정도 시인도 안 했다. 영국에서 테러 조직의 음모가 사전에 적발될 때마다 MI6와 MI5(국내정보국)가 기여했음이 짐작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된 적은 없다. 매수를 해서라도 기사를 캐내는 영국 언론도 좀처럼 이 두 기관의 보안망을 뚫지는 못한다. 윌리엄스의 임무와 사망 경위도 지금까지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MI6 구인 광고는 감춰진 신분과 국익에 헌신이라는 스파이의 양면적 존재성을 잘 표현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지었다는 옛 중앙정보부의 부훈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

 요즘 한국 국가정보원은 비밀과 대의라는 이 두 매력 포인트를 모두 잃었다. 오피스텔에 숨어서 허접한 인터넷 댓글을 달다가 야당 당원에게 꼬리가 밟힌 이른바 ‘국정원녀’, 선거 개입뿐만 아니라 별도의 개인 비리까지 들춰지는 전 원장 ….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최근 몇 년 새에도 시리아 장성, 이란 핵 전문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지도자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납치·폭파 의혹도 여러 건이다. 물론 늘 물증은 없다. 이런 ‘국가 테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일하는 그들의 능력만큼은 부럽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