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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를 찾아서|슬기로운 조상의 유산을 좇는 회기적 대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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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천 3백년전 이전의 백제예술은 지금 전하는 것이 극히 적다.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백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상한 기록조차 없고 또 유물·유적도 아리송한 채 흙 속에 묻혀있다. 학계가 근년 이 소외돼온 땅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그 찬란한 문화의 모습은 하나 둘 드러나고 있으며, 옛 3국 중 가장 유려하고 짜임새 있는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중앙일보사와 동양방송은 공동으로 학계와 제휴 백제의 높은 문화를 발굴·조사하는 사업을 벌인다. 그 첫 계획은 충남 연기지방을 중심으로 한『백제계비상의 조사』. 11월초 이 지역의 예비답사에 나섬으로써 실마리를 찾아 간추리는 작업이 착수된 것이다.
황준영교수(동대박물관강)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반은 지난 2일 충남 공주를 출발, 연기 비암사를 거쳐 조치원까지 연 40킬로의 산과 두메마을을 보행으로 살폈다. 이번 5일간에 걸친 조사에는 홍사준·신형열 문화재전문의원이 참가했다. 조사반은 이 인근에서 앞서 수습한바 있는 수점의 국보·보물의 원위치를 확인하고 이미 황폐해 있는 옛 절터를 새로 찾아 그 거대한 규모를 실측해봤다.
특히 조사의 핵심지는 연기군 전동면 금사리 다방골에 있는 비암사와 바로 산등을 격한 서면 쌍류리 생천사지.
천안·공주·조치원을 잇는 삼각의 중심점인 이 곳은 나라 잃은 백제의 귀족들이 산 속에 숨어들어 안주하며 불교의 한「센터」를 이룩했던 곳. 요즘까지 자동차길이 변변히 뚫리지 않은 두메 속으로, 절은 한층 이목을 외면해 외진데에 자리잡았다.
(곳곳에 기왓장)
(불상양식 독특)
백제 유민들은 당시의 미묘한 국제정세를 멀려하고 신앙생활에 탐닉했음을 능히 생각할 만큼 이 일대에는 불적이 부지기수이다. 골짜기의 이름이다 그러하고 옛 석물과 기왓장이 가는 곳마다 흩어져 있다. 그러나 절이 황폐한 뒤 불상 등 쓸만한 물건은 모두 반출해 갔기 때문에 지난 수년동안에 7점의 유물이 원근마올에서 발견됐다.
그 7점의 유물은 모두 비상. 곱돌을 비석모양으로 다듬어 불상으로 양각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독특하게 조성한 불상양식이다. 불상의 모습은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신앙대상인 아미타와 미륵. 특히 미륵불 가운데엔 반가상(한 손으로 턱을 괴고 한 다리를 무릎에 얹은 사유상)이 두 군데나 보여 관계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바 있다.
이 비암사에서 굴러다니던 3점의 비상은 1962년 국립박물관에 이관돼 국보(106호)와 보물(367·368호)로 각각 지정됐다. 조치원 시내의 한 신도가 모시고 있던 간불비상 역시 국보(108호)로 지정, 공주박물관에 보관돼있다.
조사반은 비암사의 옛 건물 터를 여러 곳 조사하고 또 산 너머 생천사터를 새로 찾아내 이미 반출된 불상의 일부가 이곳에 있던 것임을 밝혀졌다.
옛 절터의 대부분이 가시덤불로 덮인 생천사터에서는 시굴로써 한 집터를 찾아냈고「강희 5년」이라 적힌 기왓장을 얻음으로써 3백여년 전까지 절 건물이 남아 있었음을 밝혀냈다.
황교수는 또 본시 생천사에 있던 것으로, 지금 조치원 봉화사(서면하월리)가 비강하고 있는 2점의 비상을 조사, 문화재로 지정(보물) 신청할 뜻을 밝혔다. 불신도인 조창례여사가 간수하고 있는 이 불상은 조사를 거부하기 때문에 가까스로 설득, 실측 조사할 수 있었다.
(비상글자 뚜렷)
(옛터 10여 군데)
이러한 비상들에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만든 때와 사람들을 환히 설명해 주고 있다. 화주 중엔 백제의 8대성에 속하는「진」「전」등이 보이며 백제의 높은 벼슬인「달솔」및 그 고관이 신라한테 다시 직함을 받은「나마」「대사」등 벼슬이름도 함께 나타나있어 조선연대는 7세기 후엽. 즉 서기 6백 60년 백제가 망한 직후로 돼있다.
이번 예비조사에서도 드러난 옛 건물 터만도 10여 군데. 중앙일보는 앞으로 이 곳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여기 꽃피었던 찬란한 문화의 전모를 뚜렷이 그려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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