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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바람은 자는가|수습단계 중공문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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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6년8월8일 중국공산당 8기 11차 중앙위전체회의에서 문화혁명에 관한 16개항 결정이 발표됨과 함께 표면화된 문화혁명은,2년1개월만인 9월5일 전국29개 시·성·자치구에의 혁명위원회 설치를 성공함으로써 수습단계에 들어섰다.
홍의병을 전위로 시작되었던 문화혁명은 이른바 삼결합 방식으로 유소기·등소평을 우두머리로 한 조정주의적 실권파로 부터 권력을 탈취, 초기에 폭주하던 홍위병을 서서히 후퇴시키면서 광범한 대중과의 결합을 꾀함으로써 전국적인 혁명위 성립에 성공한 것이다.
홍위병은 어디까지나 열병이었을뿐 실권파로 부터의 탈권투쟁의 주체는 군으로한 혁명위 성립에의 기본요건인 삼결합 방식이란 ⓛ혁명적 대중조직자의 책임자 ②현지주둔부대(또는민병)의 책임자 ③당 정부기관의 혁명적 지도 간부의 협력체제었다.
혁명위 실권파로부터의 탈권으로 형성된 새로운 권력기구로서 종래의 당 인민위원회(행정)를 해체하여, 그지역의 당·행정·재정·문화의 사권을 한손에 쥐고있다.

<전국혁명위 성립>
삼결합의 의미를 설명하는 인민일보는『세방면을 조직적으로 밀접하게 결합시켜「프를례타리아」독재와 자본주의 부활방지의 필요에 한층 적응시키기위한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같이 분석했다.
삼결합에서의 대중대표는 혁명위의 회의에 참가하여 대중의 의사와 요구를 반영함과 동시애 결정된 호소나 결의를 대중에게 전달한다.

<연기된 전당대회>
군 대표는 정치를 전면에 밀어낸다는 뛰어난 전통을 솔선실행하고 또 혁명간부는 계급투쟁에 주력하여 정책입안에서 크게 공헌했다.
모택동-임표 체제의 기반이라고 할 혁명위의 전국적 성립에 이어 등장할것은 정당과 제9차 전당대회이다.
모 자신이 앞으로의 단계로서『계급대열의 순결화·당의정돈』을 지시한 사실은 그동안 일부에서 관측되어오던 전당대회의 9월중 개최는 불가능시되며 아무래도 내년초쯤에나 가능할것으로 예측되고있다.

<하루아침의 비약>
새로운 권력기구인 혁명위가 전국적으로 성립됨으로써 수습단계에 들어선 문화혁명에서 일부관측자가 주목하고 있는것은 장기적으로보아 모택동이 자기후계자로서 누구를 선택했는가의 문제이다.
다음 후계자는 물론 당부주석겸 국방상인 임표인 것은 명백하지만 66년만 하더라도 당내 서열이 1백98번이던 도문원이란 평논가가 금년7월1일에는 11위로 약진하더니 지난7일 북경에서 열린 혁명위 전국성립축전에서는 강위문 혁제1부총장 다음인 7위로 비약한 사실은 비상한 주목을 끌고있다.
문화혁명이란 과정에서 새파란 신인이 하루아침에 권좌의 측근으로 비약한 자는 요문원밖에는 없었다.
「홍콩」의「사우드·차이나·모닝포스트」지는 최근 「북경의 유망한 별」이란 제하에 요문원이 「2년동안에 무명의 문화평론가로부터 모주석의 심복이 되었다』고 평했다.
요의 생년월일은 불명이나 30대의 젊음으로 추측되고있다.
그의이름이 공직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58년4윌14일 중화전국청년연합회 제3기위원으로 선출된 때이다.
당시 이미 보수파의 작가를 모충상의 입장에서 공격,64년7월에는 사학자 주곡성을 비판했다.

<파란안은 당정비>
이런 활동을 모에게 인정받은 요는 문혁의 봉홧불격인「해서파관비평」을 상해의 문반보에 게재하기에 성공했다.
그후 66년 요는 등척·요말사등을 비평하고 67년1월「홍기」지 에서 당선전부부장,9월에는 선전부장 도주비판논문을 실었다.
그리하여 금년1월 도는 장춘교주임과 함께 강생고문의 책임자가되어 당의 재건 정돈「그룹」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당내최고수뇌에의 길과 직결되는것이다.

<후계싸움 새국면>
이런 의미에서 8월말 문혁의 전기에서「홍기」지에『노동자가 모든것을 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중요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당중앙이 그를 앞으로의 이론적지도자로 밀고있는것으로 생각되기때문에 장기적으로본 모의 후계자선정 문제에는 비상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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