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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화학무기 방관 않겠다더니 … 미적대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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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30일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상황을 바꿀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화학무기를 사용하거나 테러 단체에 전달한 사실이 확인되면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어선 것으로 여겨 무력 개입 등 “동원 가능한 방안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문제에 관해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4일(현지시간)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인 사린 신경가스를 사용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앞서 유엔 조사팀도 지난 3월과 4월 시리아에서 최소 네 차례 독성 화학무기 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제이 카니 미 백악관 대변인은 4일 “누가 언제 사용했는지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오바마 정부가 취해온 신중 모드를 재확인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 반군, 특히 과격 이슬람 지하드 그룹에 무기를 공급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확전도 부담이 된다. 미국이 적극 개입할 경우 이란·레바논·이스라엘 등 주변국을 끌어들여 국제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여론도 전쟁 반대가 우세한 데다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아 섣불리 무력 개입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미국은 서방의 리비아·말리 군사 개입 때도 영국·프랑스를 측면 지원하는 데 그쳤다.

 이라크 전쟁의 교훈도 작용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를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승리 이후 WMD를 찾아내지 못해 ‘잘못된 전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미국은 시리아에 적극 개입하는 대신 인접 요르단에 요격용 패트리엇 미사일과 F-16 전투기를 파견하기로 했다. 시리아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시리아의 최대 우방으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두둔해온 러시아는 미국의 이 같은 조치가 사실상의 군사 개입이라며 비판했다. 러시아는 최근 시리아 정부에 S-300 방공미사일을 제공했다.

 미국과 달리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적극적이다. 로랑 파비위스 프랑스 외무장관은 4일 “시리아 정부가 확실하게 한 차례 이상 사린 신경가스를 사용했다”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금지선을 넘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린 가스를 생산하거나 저장하는 장소에 군사력을 투입하는 등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희생자들의 혈액과 소변이 포함된 샘플은 시리아 정부군 헬기가 지난 4월 29일 북부 이들리브 인근 사라키브를 공격한 직후 채취됐다고 한 외교관은 전했다. 영국도 프랑스의 입장에 동조했다.

 시리아는 화학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알아사드 정부는 그동안 외부 공격에 대해서만 화학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며 보유 사실을 인정했다. BBC는 시리아가 사린 신경가스 외에 맹독성 머스터드 가스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인도 방위안보보고서에 따르면 시리아는 50여 곳에 1000t의 화학무기를 분산·저장하고 있다. 시리아는 1972~73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앞두고 이집트로부터 화학무기를 처음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80년대에는 자체적으로 대량 생산에 성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3월엔 시리아 북부 칸 알아살에서 최소 27명이 화학무기 공격으로 희생당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시리아 정부군과 시민군은 서로 상대방의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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