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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프리」미민주당 대통령후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시키고28일UPI동양】「휴버트·호테이쇼·험프리」부통령은 1911년5월27일「사우드·다코타」주 「윌리스」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약사였으며 시의회의원·시장 및 주하원의원 등을 지냈었다.
「휴버트」는 1929년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미네소타」대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뒤인 1931년 재정난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했다. 이후 6년동안 그는 「덴버」약학교(「콜로라도」주)에 다닌 6개월을 빼고는 내내 아버지의 약국에서 일을했다.
그는 1937년 「미네소타」대학교에 복교, 정치학을 전공하고 1939년 졸업,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배튼·루지」시소재)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획득했다.
이어 그는 모교인 「미네소타」대학교에서 1년간 교편생활을 했으며 1943년에는 전시인력증진위원회의 지구부책임자가 되었다.
그가경제에 투신한것은 바로 같은해인 1943년이었는데 이해 그는「미네아폴리스」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뒤 그는 이웃「세인트·폴」시의 「마칼레스터」대학에서 다시 교편을 잡는한편 지방 「라디오」방송국의 「뉴스」해설가로 일하면서 계속 적극적으로 정치에관여, 1944년에는 「미네소타」주 민주당과 노동당의합병에 공을세우고 다음해인 1945년에「미네아폴리스」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1947년 미국도시사상 최고득표로 시장에 재선되었으며 1948년「미네소타」주에서 민주당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1941년1월 상원의원에 취임, 첫번연설에서 동료의원들의 안일한태도를 비난하여 건방지다는 평을 듣기도했으나 곧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게됐으며 상원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의원이 되었다.
그는 1954년과 1960년에 계속 상원의원에 당선됐으며 1961년에는 상원민주당 원내총무가 되어 1965년 부통령이 될때까지 원내총무직을 계속했다.
그가 대통령이나 부통령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것은 이미 1952년부터 운위되었으나 1956년에 부통령후보 지명전에 출마했다가 「이스츠·키포버」상원의원 (민주당「테네시」주)에게 패배했고, 1960년에는 대통령지명전 출마를 선언했었으나 중요한 「위스큰신」주 및 「웨스드 버지니아」주의 예선에서 고「케네디」대통령(당시 상원의원)에 패배한뒤 지명전에서 사퇴해 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1964년「존슨」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그후 오늘에 이르렀다. 「험프리」부통령은 1936년「뮤리엘·페이·버크」양과 결혼하여 현재 슬하에 4명의 자녀와 4명의 손자를 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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