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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지하철 역에 서보니 파리가 한눈에 보이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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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파리지앙 이야기
로랑 도이치 지음
이훈범 옮김, 중앙북스
356쪽, 1만8000원

“파리는 미사의 가치가 있다.”

 16세기 프랑스 왕위에 올라 앙리 4세로 불린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 계승자 시절 한 말이다. 신교도였던 그는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이후 계속된 종교 갈등의 중심에 있던 인물.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해 파리에 입성한 그의 말은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작은 이익쯤은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관용구가 됐단다.

 책은 역(驛)으로 더듬어간 파리 역사(歷史)다. 신앙을 포기하면서도 차지하고 싶었던, 한때 세계 문화와 예술의 수도(首都)였던 파리의 역사를 21개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골족이 로마제국 카이사르 휘하 장병들과 싸움을 벌이던 기원전 1세기(시테역)에서 20세기 후반 지어진 금융상업지구 라데팡스(라데팡스역)까지 시대별로 땅밑을 오간다.

 지은이는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은 배우. 학문적 경력을 쌓은 강단사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미덕으로 작용한 느낌이다. 방대한 자료를 자유롭게 오가며 흥미진진한 사실을 유려하게 전달하는 솜씨는 어지간한 책상물림에겐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노래한 파리 낭만의 상징 센강의 이름은 만병을 치유해 주는 골족의 여신 세카나에서 비롯됐다. 1546년부터 루브르궁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원정에 실패해 포로 신세가 됐을 당시 체감한 르네상스 ‘불꽃’을 옮겨오려는 시도였다고 한다.

 또 1588년 신구교 갈등 때 가톨릭을 지지하는 파리 주민들이 앙리 3세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면서 흙을 채워 넣은 큰 통(바리크)을 쌓아 도로를 봉쇄한 데서 ‘바리케이드’란 말이 나왔다. 프랑스 대혁명을 알린 바스티유 감옥 습격도 실상은 엉뚱하다.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두려움의 장소였지만 이미 죄수보다 간수가 많아 국고 절감을 위해 폐쇄가 논의되던 참이었고, 그나마 시위군중이 ‘탄약과 포탄을 얻기 위해’ 바스티유를 점령했을 때 죄수는 불과 7명, 그나마 정치범이 아닌 시답잖은 사기꾼들이었단다.

 정사(正史)에선 만나기 힘든, 흥미롭지만 소소한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화려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의미심장한 글 또한 매혹적이다.

 “마침내 로마군의 나팔이 긴 탄식을 쏟아냈고 곧 후퇴했다.” 로마군과 골족의 1차 전투를 묘사한 구절은 문학의 향취가 풍긴다. 그런가 하면 “건물을 지은 노동자 모두에게 황제가 사랑받은 것은 아니었다. 파비용 레디기에르 종탑의 N자(재건축을 지시한 나폴레옹 3세의 머릿글자)를 유심히 보라. 글자가 뒤집혀 있다. 황제의 권력을 평화롭게 뒤집는 방법이다” 에선 여유와 웃음, 그리고 비판 정신이 읽힌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늘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우리 사회의 화두로도 이야기되는 ‘톨레랑스(관용)’가 파리에서만 신교도 3000명이 학살된 바르톨로뮤 학살을 겪은 프랑스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그렇다. 또 절대군주로 알려진 루이 14세가 늙고 기력이 없는 상이용사들을 위한 수용시설 ‘앵발리드’를 지었다는 사실도 뜻밖이다.

 한마디로 재미있는 역사, 멋진 에세이, 뜻 깊은 기행문이다. 얼마 전 출간된 서울 이야기 『오래된 서울』(동하)과 견주어 읽으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다. 

김성희(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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