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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종이마패'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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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1970년 2월의 일이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박태준 사장에게 위기가 닥쳤다.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의 간섭이 심해 제철에 필요한 고로 등 핵심시설 구입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상납요구 때문에 투자비 부담이 커지는 것은 차치하고 제때 구입승인을 못 받아 투자시기를 놓칠까 큰 걱정이었다. 청와대 보고가 있던 날,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머뭇거리던 박 사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원하는 걸 빠짐없이 적어보라”며 종이 한 장을 건넨다. 박 사장이 쓴 내용을 쭉 훑어본 대통령은 왼쪽 상단에 친필서명을 했다. 사람들은 이를 어떤 외압도 막아낼 수 있는 ‘종이마패’라 불렀다. 74년 드디어 일본에 이어 우리도 종합제철소 가동에 들어갔고 이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도화선이 됐다. 기업인의 도전정신과 이를 알아보고 전폭 지원해 준 정부, 그리고 내 일처럼 매달린 근로자가 삼두마차를 이뤄 달렸기에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었다.

 최근 글로벌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선진국들도 기업가정신을 고취시키느라 분주하다. ‘종이마패’라도 쥐여줄 태세다. 올 2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첫 국정연설에서 거대 자석처럼 미국으로 새 일자리와 기업을 끌어들이는 것이 최우선 정책이라고 밝혔다. 해외 생산기지를 본국으로 이전하면 세금 감면 등 지원책도 펼치고 있다. 이민법을 개정해 해외 고급인재 유치에도 시동을 걸었다. 이에 화답하듯 애플과 구글을 위시해 GE·월풀·오티스엘리베이터 등의 ‘컴백홈’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아베노믹스를 내세우고 침체 늪 탈출을 꿈꾸는 일본도 기업 모시기 경쟁에 본격 가세했다. 다시 한번 ‘세계의 성장센터’로 우뚝 서겠다며 파격적인 규제 완화와 법인세 감면을 통해 중국에 나간 기업들을 불러들이는 중이다. NEC와 후지제록스·닛산 등의 귀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EU도 제조업 비중을 16%에서 2020년까지 20%로 높이는 ‘신산업정책’을 표방하며 지역별로 생산기지 유치에 나서는 등 해외로 간 기업들의 복귀를 독려 중이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산업 르네상스에 공들이고 있는 데 반해 국내 풍경은 상당히 이질적인 것 같다. 유해물질 누출사고를 일으킬 경우 기업 존립이 어려울 정도로 거액의 과징금을 물리는 법안이 입법되는가 하면, 노사관행과 합의를 도외시하고 통상임금의 범위를 확장하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수만 명의 근로자가 일하는 기업이 한 번의 실수로 문 닫을 수 있고, 수많은 기업이 통상임금 누락분을 지급하느라 투자와 고용을 중단해야 할 상황에 몰리고 있다. 6월 임시국회에서는 갑의 불공정 거래행위에 최고 10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리는 이른바 ‘남양유업방지법’도 추진된다고 한다. 이러다 기업을 불러모으기보다 내모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 경제성장률이 사상 처음으로 8분기 연속 0%대로 낮은 포복을 하고 신설기업의 행렬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1000조원의 가계부채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병철·정주영·박태준 같은 거물급 스타 경영자의 탄생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 맥킨지는 한국경제를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한 바 있다. 다가올 위험을 놓치고 종국에는 죽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성장 늪 탈출이 급선무다. 성장의 앞바퀴에 힘을 실어 한국경제가 계속 전진하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야 그 힘으로 복지의 뒷바퀴도 따라올 수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성장에 앞세워 부실국가로 전락한 그리스나 스페인의 선례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창조경제의 시대를 맞아 불굴의 도전정신이 되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마녀사냥하듯 대기업을 비난하기보다 그 역할과 공로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응원해주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해 나갔으면 한다. 얼마 전 상공회의소에서 장수기업들에 ‘70년대에 비해 기업하기 나아졌는지’를 물어보았다. 열 곳 중 여섯 곳이 ‘나빠졌다’고 답했다. 규제와 간섭 때문에 힘들고 반기업 정서까지 만연해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면 한다. 70년대 종이마패에 담긴 뜻을 새겨봐야 할 때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