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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마식령 스키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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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영종
정치국제부문 차장

북한에선 요즘 때아닌 겨울 채비가 한창이다. 강원도 원산 마식령 스키장 건설 공사다. 문천시 부방리와 법동군 작동리 사이에 있는 해발 768m 마식령은 평양~원산 간 도로가 지나는 준령이다. 11월 초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적설량이 많아 스키장 입지로 적합한 지역이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얼마 전 이곳에 스키장을 지으라고 지시하면서 관할 5군단 병력이 총출동했다.

 규모도 엄청나다. 수십만㎡ 면적에 40~120m 폭의 슬로프 여럿을 건설한다는 청사진이다. “세계적 스키장으로 꾸리려는 게 노동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지시하면서 공사에 불이 붙었다. 노동신문에는 울창한 산림을 밀어낸 황토빛 초대형 슬로프 부지가 드러난다. 호텔과 헬기장도 들어선다. 당장 올겨울부터 가동하라는 게 김정은의 지시다. 한 노동당 간부는 방북 기업인에게 “스키 전문가인 김정은 원수님이 스키장 개발을 직접 발기했다”고 치켜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며칠 전 김정은은 벤츠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를 타고 이곳을 찾았다. 그는 “용감성과 민첩성을 키워주는 스키 운동은 전문 선수뿐 아니라 아이·어른 모두가 좋아하는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스키장이 건설되면 온 나라에 스키 바람이 불 것”이라는 기대도 보였다. 북한 인구 2400만 명 중 마식령에서 스키를 즐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차라리 평양 로열패밀리와 노동당과 군부의 고위 측근들을 위한 전용시설로 이름 붙이는 게 나을 듯하다.

 민생 챙기기와는 동떨어진 김정은의 이런 행보는 지난해 11월에도 있었다. 군부대 기마중대에 들른 그는 이곳을 승마장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근로자와 청소년의 체력단련을 위한 것이란 명분이었다. 서방에서 수입한 준마를 타고 나타난 김정은은 “승마구락부가 생기면 승마운동 바람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스키장을 시작으로 마식령 일대를 리조트 단지로 만들고, 장차 관광특구로 개발한다는 게 김정은의 구상이라고 한다. 군용 비행장인 원산 갈마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만드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외국 자본 유치와 해외 관광객 모집이 필수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아 보인다. 국제사회는 123개 한국기업이 진출한 개성공단의 문을 북한 당국이 하루아침에 걸어잠그는 걸 목도했다. 10여 년 전부터 7억 달러가 넘는 대북 식량차관을 받아 챙기고도 상환 요구를 묵살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은 지난 3월 말 ‘경제·핵 병진’ 노선을 제시했다. 핵보유로 재래식 무기 조달에 쓸 국방비가 적게 들게 됐으니 민간 경제로 자금을 돌린다는 논리였다. 핵무기 보유와 경제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 첫 발걸음이 동해안 지역 스키장과 리조트 건설이다. “인민들이 다시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던 그의 공언이 스키장 건설로 지켜지긴 어려워 보인다. 승마장이 식량난에 지친 민심을 달래줄 수도 없다.

이영종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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