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내기 눈치보여… 아이 아파도 주말까지 진료 미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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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직장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아이의 건강이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직장맘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친정·시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보모를 고용할 여유가 없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아이를 제때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해 병을 키우기도 한다.

 중앙일보가 맞벌이 직장맘 30명, 보육교사 1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대부분 그런 고충을 털어놨다. 18개월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서모(31·무역회사 근무)씨는 “지난주에 아이 귀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감기 치료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속이 너무 상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광명시 회사원 최모(32)씨는 “아이가 좀 아파도 약을 먹여 어린이집에 보냈다가 주말에 병원에 데리고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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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의 치료 시기를 놓치는 이유는 갑자기 휴가를 쓰려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직장 분위기 탓이 크다. 서울 성동구 직장맘 박모(36)씨는 지난해 아이가 수두에 걸렸을 때 어쩔 수 없이 휴가를 썼지만 집에서 회사 일을 해야 했다. 회사 상사가 “업무에 지장이 심하다. 집에서라도 일해서 보내라”라고 해서다. 스웨덴은 12세 이하 아이가 아프면 연 120일 휴가를 쓸 수 있고, 임금은 사회보험에서 지원한다. 한국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김춘진 민주당 의원이 지난 3월 만 6세 이하 자녀가 독감·수두 등의 법정감염병에 걸렸을 때 부모가 사흘간 유급휴가를 쓸 수 있는 규정을 담은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발의해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아이가 아픈데도 어린이집으로 보내라는 원장 압박을 받기도 한다. 서울 강남구 한모(36·호텔 근무)씨는 최근 아이의 감기가 낫지 않아 어린이집을 한 달 중 나흘밖에 보내지 못했다. 이 경우 보육지원금이 25%만 나온다. 이 어린이집 원장은 “제대로 출석하지 않으면 돈이 안 나오는데, 다음 달에 아이를 뺄 거냐”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어린이집에 늦게까지 아이를 맡기는 부모의 고민은 더 크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 없이 TV 시청 등으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여서 아이의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받지나 않을까 우려한다. 서울 송파구 한 어린이집은 마지막 남은 아이 혼자만 두고 원장이 집을 비웠다가 부모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한 어린이집 교사는 오후 4시30분에 혼자 남은 아이를 두고 원장이 “쟨 혼자 굉장히 잘 놀아. 그냥 노래 틀어주고 나와”라고 말한 사실을 한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이 교사는 “아이가 혼자 한 시간가량 방안에 누워 있었다. 애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밝혔다. 서울 관악구 어린이집 교사 최모(29·여)씨는 “맞벌이 가정 아이들은 욕구불만이 많아서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

 혼자 남은 기억은 오래 가기도 한다. 직장맘 이모(43·서울 영등포구)씨의 초등학교 6학년 딸은 요즘도 “어린이집에 선생님하고 둘이 남았을 때 너무 깜깜하고 심심했다”고 말한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노경선 박사는 “딴 아이들이 귀가한 뒤 혼자 남는 아이는 ‘ 엄마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라며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며 “교사들이 책을 읽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보살펴야 아이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신철희 아동청소년상담센터 소장은 “0~2세 영아는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좋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보낼 경우 정서 발달 상황을 체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이지영·고성표·장주영·이승호·강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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