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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 앞에 역경 없다|재활촌「오도회」고근홍 회장을 찾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6·25가 일어난지도 18년이 되었다. 22만7천7백여 명의 전사자를 포함, 99만8천여 명의 인명 손실을 가져온 6·25의 비극의 주인공 속에도 희망찬 내일에의 비약을 꿈꾸며 꿋꿋이 살아가는 용사들이 있다. 서울 영등포구 신대방동에 자리잡은 재활용사촌의 전상자들이 바로 역경을 이겨 나온 사람들이다. 모두 39동의 아담한 양옥집에 61명의 척수불구자를 포함한 78가구가 오붓하게 모여 사는 이 용사촌은 지난 61년에 첫입주자가 살기 시작한 이래 1명의 이탈자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자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마을 복판에 자리잡은 작업장에선 공예품·조각품·미술품이 생산되어 미8군에 납품된다.
아침 9시30분이면 이곳에 사는 2백여 주민이 작업장에 나가 낮 12시까지 2시간반씩 일한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이 하루에 1백50원에서 2백원.
작년 「런던」에서 열린 척수장애자 체육대회에서 우승한 조금임 여사도 이곳 「멤버」중의 하나.
작업이 끝나면 탁구나 궁도로 심신을 단련한다.
이곳의 공식명칭은 대한상이군경회 신대방동 특별본회이지만 이들은 스스로 「오도회」란 이름을 즐겨 쓴다.
『스스로 살길을 찾아 희망찬 삶을 살아보자』는 뜻에서 오도회라고 이름했다고 고근홍 회장(36)은 말한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고씨는 연백중학교를 졸업한 바로 뒤인 17살 때 국군에 입대했다. 고씨가 첫 전투경험을 얻은 것은 입대직후인 49년7월15일 개성에서 남침하는 괴뢰군과의 전투였다.
6·25 당시엔 수색에 있다가 제대로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후퇴했다. 51년3월7일 새벽6시 당시 1등 중사였던 고씨는 부분대장으로 강원도 횡성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중공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4후퇴 후 다시 반격을 가하던 때였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하오 7시까지 계속 됐으나 피아 쌍방에 막대한 희생자를 냈을 뿐 승패를 가름하지 못했다.
중대장은 『내일 다시 공격하자』면서 후퇴 명령을 내렸다.
엎드려 총을 있던 고씨가 뒤로 물러나려고 일어난 순간 적탄이 고씨의 오른쪽 목에서 왼쪽 등으로 뚫고 나갔다.
수원에 임시로 마련된 야전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대구 제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부산 제3육군병원을 나오기까지의 10년 동안 병상에서의 고통과 심리적 압박감은 이루 필설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자살을 기도한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마비된 하반신을 잘라 버리려고 생각한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더우기 어린 시절에 친했던 친구들이 「휠·체어」를 몰고 다니는 자기를 보고 고개를 돌릴 때는 가슴속에서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했다.
상이군·경이라 하면 버스나 열차 속에서 물건을 강매하거나 직장을 찾아다니며 공갈로 돈이나 뜯어가는 것으로 일반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그는 일부 자포 자기한 부상자들이 생활에 충실치 못한 것도 이해로 선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가 부인 김귀선씨(35)와 결혼한 것은 부상한지 4년 뒤인 55년 가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뒤 약 반년 동안 교제 끝에 병상에 있던 동료들의 축복 속에 식을 올렸다 했다. 병원장은 물론 부산시장까지 참석한 고씨의 결혼식장은 어느 누구의 식장보다 성대했는데 첫날 밤을 지낸 뒤 고씨는 부인의 희생적인 정신에 감격,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앞으로는 작업장을 더 늘려 외화를 더 많이 벌어들이고 딸 미경양(10·영동국민교5년)을 대학교까지 졸업시키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라는 고씨는 이런 소망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소망이라면서 밝은 내일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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