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글로벌기업 해외법인장 '어그레시브 코리안' 전성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새 법인장에 어그레시브(Aggressive, 공격적인) 코리안이 온대요.”

 지난해 4월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사인 노바티스의 싱가포르 법인에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올 5월로 이곳에 부임한 지 만 1년이 된 김은영(39) 법인장을 두고 한 말이다.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그는 2000년대 초반 한국법인에서 근무하면서 고혈압 치료제 ‘디오반’의 성장률을 전 세계 지사 가운데 1위로 끌어올렸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어그레시브’가 따라다녔다. 글로벌 브랜드 매니저로서 스위스 본사에서 근무하는 행운을 누렸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의 ‘공격성’은 노바티스 식구들이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굳히는 데 크게 작용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싱가포르 법인장으로 간다는 소식에 현지 직원들이 초긴장 상태에 빠진 것이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현지 법인장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본사와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면서, 현지에서 채용한 직원들을 다독이며 시장을 넓혀나가는 임무다. 현지 사정을 꿰뚫고, 문화를 이해해야 시장 침투가 가능하다. 군인으로 치면 야전사령관과 일맥상통한다. 글로벌 기업의 현지 시장 진출 초기에는 본사의 철학과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는 본사 인물이 지휘봉을 잡게 마련이다. 국내에서도 시장 진출 초기 국내 기업과 제휴를 맺는 방식으로 발을 디딘 다국적 기업은 단독 법인을 세우는 단계에서 본사 인력 가운데 법인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점차 비즈니스 면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이 알려지고, 글로벌 무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국내 법인장은 한국인이 맡게 됐다. 이젠 한걸음 더 나아가 해외 법인장까지 한국인이 득세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경쟁이 심한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코리안이라면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이 글로벌 기업 간에 정설이 되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인 중에서도 장보고의 기질을 갖춘 ‘글로벌 코리안’의 전성시대다.

 노바티스 최초의 한국인 법인장으로 임명된 김은영 상무는 현재 싱가포르에서 100여 명의 직원을 통솔하고 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성취하고 싶은 목표를 생각나는 대로 하달했다. 이른바 한국식이었다. 그러자 직원들이 “역시 소문대로 독종”이라고 수군대며 손을 들었다. 김 법인장은 부임 첫해 이들을 다독이는 데 정성을 다했다. 그는 “목표 수준을 조금 낮췄더니 직원들의 적응 속도가 빨라지더라”며 “다양성을 인정하고 인간적으로 다가가니 어느 순간부터 따뜻한 보스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롤 모델로 삼고 있는 후배들 때문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성취감 때문에 살 맛이 난다”며 “3∼4년 싱가포르에서 근무한 다음 한국 법인장으로 금의환향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올 3월 다우케미칼 한국법인의 강상호(43) 상무는 베트남 법인장 발령을 받고 호찌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베트남인 까닭에 80여 명의 직원 사이에서는 ‘신화의 에릭을 닮은 사장님’이 오는 것을 환영했다는 후문이다. 그가 베트남 법인장으로 임명된 배경은 한국에서의 탁월한 실적 때문이었다. 2009년 다우케미칼에 합병된 전자재료 기업 롬앤하스에서 일해 온 강 상무는 한국법인에서 디스플레이 사업부의 영업총괄과 마케팅 총괄직을 맡으면서 회사에 큰 수익을 안겨줬다.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의 반도체 회사와 플래시메모리에 사용되는 고집적 미세회로용 인쇄재료 개발 프로젝트를 맡아 설비변경 없이 개발하는 데 한몫했다. 이번에 그가 맡은 임무는 인구 9000만 명에 평균연령이 30세가 안 되는 베트남에서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것. 강 법인장은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직원들과 친숙해지기 위해 베트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고객·협력업체와 베트남 내 성장 전략을 짜고, 한 달에 한두 번 하노이로 출장을 가서 정부관료를 만나는 게 일”이라며 “호찌민 시내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를 방문하는 사회봉사 활동으로 미국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작업도 중요 임무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달 1일자로 다국적 제약사 릴리의 말레이시아 법인장으로 발령받은 함태진(41) 한국릴리 부사장은 출국 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외국인을 부하직원으로 두고 일하는 게 처음이지만 머리뿐 아니라 마음으로 끌 수 있는 리더가 되겠다”고 말했다. 함 법인장은 현재 150명의 직원과 함께 일하고 있다. 이 밖에 이베이코리아의 박주만 사장이 호주법인장으로 최근 임명됐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코리아 김진호 사장은 영국 본사의 수석부사장과 북아시아 총괄책임자를 겸하고 있다.

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