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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의 자유화 물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외신에 의하면 「베오그라드」의 「데모」학생들은 「티토」대통령으로터 「유고」의 경제및 사회생활과 공산당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겠다는 내용의 확고한 보장을 받고 정상적인 학생생활로 되돌아갔다한다. 즉 「티토」는 지난 9일밤 전국민을향한 방송연설에서 이번 학생들의 반항적인 「데모」의 책임이 자기 자신과 공산당및 정부에있었음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만약에 학생들의 개혁요구를 충족시켜 주지못하면, 그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로써 학생「데모」대대 경찰간의 충돌및 「데모」학생들의 학원점령으로 말미암아 소란스러워졌던 「유고」의 정치위기는 일단 가셔진 느낌을 주고있다. 사태의 발생 및 경과 과정을 더듬어 보건대, 6윌초 「베오그라드」대학생들은 정부및 당에대해서 ①사회적의 불공평시정 ②실업자문제의 해결 ③당을비롯한 모든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참다운민주화 ④교육제도의 개혁등 요구조건을 내걸고 평화적인 시위를 벌었던것이다. 그런데 이 평화적인 시위가 경찰의 탄압을 받아 1백여명의 부상자를 내게되자, 학생「데모」는 과격한 양상을 띠기 시작, 「데모」를 탄압한 경찰책임자및 「데모」사태를 왜곡보도한 모든 국영 「매스콤」의 책임자의 경질을 요구하면서 농성투쟁에 들어갔었다.
학교당국은 대학생들의 요구를 전폭 지지한다고 선언했었는데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자 「티토」대통령은 정치적결단을 내려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티토」의 개혁요구수락은 학생들이 행동대로 앞장선, 「유고」의 자유화·민주화운동의 승리요, 또한 공산당전제정치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라 볼수있다.
1947∼48년, 「스탈린」과 「티토」의 결정적 불화이후 일찍부터 「모스크바」의 통제에서 벗어난 「유고슬라비아」는 독자적 입장에서 사회주의건설의 길을 걸어왔고, 또 그 「티토」노선은 「내셔널리즘」과 결부된 사회주의로서 반소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한동안 서방진영의 동정을 받은 일도 있다. 「스탈린」 사망후 「유고」는 소련과 재 화해하였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소련의 정치적 통제나 영향권밖에서 성장한 사회주의 국가였기때문에 56년이후 비「스탈린」화 선풍이 소련과 기타 동구권을 휩쓸게되었을때에도 그 파급을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고」역시 공산당의 전형적인 관료주의통치를 받고있는 나라로서 국제정치조류상 나타난 권력의 다원화경향과 기술혁신이라는 새시대의 요구에 적응치 못하여 국가발전의 「템포」는 그동안 심히 둔화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시대적인 공산관료통치에대해서 시대감각에 예민한 대학생들이 자유화·민주화의요구를 내세워 항거를 벌여, 승리의 열매를 따게 된것이 금차의 사건이요, 따라서 이번 변혁은 「유고」사회의 낙후성·정체성을 극복하고 발전적 전진을 이룩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될것이다.
금년2월 「체코슬로바키아」의 학생들은 자유화·민주화운동의 선풍을 일으켜, 동국내 「스탈린」주의정권을 뒤집어엎고 「스탈린」주의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말았는데 이번에 「유고」의 학생들 역시 자유투쟁에 앞장서 관료통치의 기반위에서 안면하던 「티토」정권에 결정타를 가하고 그 각성을 촉구했다는것은 공산치하의 인민이 점차로 자유해방의 횃불을 맞이하고있는 징조로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경하할만한일이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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