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노트북을 열며] 또 特檢만 바라볼 건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헌법 제69조 대통령 취임 선서문)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제66조 3항)

대통령에 관한 20개의 헌법 조항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의무로 적어둔 부분이 이렇게 두 군데 있다. 온 나라를 흔들고 있는 '대북 송금 사건'을 두고 청와대가 계속 당당한 건 바로 그 대목 때문이다.

"국익을 위한 초법적 통치행위였다"는 해명 뒤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일이었다"는 논거가 깔려 있다. 5일에는 사건 전말의 공개가 부적절하다는 대통령의 발언도 있었다.

아마 초기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국민이 몰라주는 게 더 좋은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춰뒀던 사건의 비밀이 어느 날 깨지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계속 퍼주면서도 당하기만 하는 우리 정부를 안타깝게 쳐다보면서도 북한과의 일만큼은 꾹꾹 참아온 국민이다. 그러던 차에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는 일이 터진 것이다.

"위법이 다 들통났고 여론이 납득을 못하는데 무슨 변명이 통하겠느냐." 요즘 신문사에 걸려오는 전화의 상당수는 이런 내용이다. 이제 알 건 알아야겠고, 이번만큼은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그냥 덮고 넘어가자고 한다. 마치 "너희가 뭘 알아"하는 투다.

그런 와중에 검찰이 보인 태도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남북교류협력법.금융실명거래법.외국환거래법…. 언뜻 봐도 범법(犯法)덩어리인데다 온갖 의혹이 꼬리를 물었건만 검찰은 '수사 유보'를 선언했다.

최소한 전말을 찾아들어가 과연 통치행위로 볼 수 있는건지 아닌지 법적 판단이라도 해줘야 할 사법기관이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일개 민간인에서 발탁될 특별검사에게 스스로 떠넘겼다. 정규군이 외인부대에 작전권을 넘겨주고 무장해제된 꼴이다.

가뜩이나 '개혁대상 1호'라고 수모를 당하는 때 또 다시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자초한 것이다. 이제 누가 뭐라 건드려도 맞받아칠 펀치가 없다.

역사에 기록될 대북 2억달러 송금 사건을 놓고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다. 국민이 상처받은 만큼 청와대와 검찰도 상처를 입었다.

특히 검찰의 상처는 앞으로 구성될 특검이 어떻게 활약하느냐에 따라 더 커질 수 있다.

검찰은 지금 겨울방학 중이다. '검찰개혁'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환경이 바뀌게 될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개학 후 어떻게 재단될건지를 가름할 숙제들 중 두 가지는 이미 그르쳤다. 하나는 송금사건, 또 하나는 '김대업 수사'다.

金씨는 지난해 7월 자객(刺客)처럼 나타나 대통령 선거전을 마구 칼질한 사람이다. "병풍(이회창씨 두 아들 병역면제 의혹사건)은 정말 있었는데 은폐.조작됐다"로 시작된 그의 단계적 폭로에 대선 길목은 몇달간 시끄러웠다.

그 반년 뒤인 5일 검찰은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병역비리가 실제 있었는지, 여권이 이를 대선전략으로 이용했는지 하는 본질은 두루뭉술 넘어갔다. 대신 명예훼손이니 공무원 사칭 같은 곁가지를 성과라고 내밀었다.

수뇌부를 '정치검찰 세대'라고 표현하며 동반퇴진론을 편 어느 검사의 심정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검찰이 더 이상 허약해져선 곤란하다. 자칫하면 경찰이 요즈음 검찰에 요구하듯, 검찰이 '특검으로부터 수사권 독립'을 외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김석현 사건사회부장 <sherk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