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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축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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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질펀한 잔디위를 홍·청의 젊은이들이「볼」을쫓아 질주한다. 조국의 명예와「아시아」의 우의를 다짐하며 젊음을 불태우는「내일의 축구선수들」
만20세의 청소년들이라「플레이」는 어설퍼도 뛰고쫓는 그들의 모습은 티없이 맑기만 하다.
4천「달러」의「라만·컵」을다루는「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는 올해로써 꼭 열번째. 59년에 시작된 이대회에 우리는 줄곧 참가, 1, 2회에 우승하고 4회때는 준우승, 5회때는「버마」와공동우승했다. 그후로는「한국축구」의 쇠퇴와함께 우승권에서 탈락, 내일의 우리축구에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번 제10회대회는 이침체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만난을 물리치고 서울에 유치한것. 승부의 결과는 두고 볼일이지만 이대회를위해 서울운동장의「론·그라운드」와「나이터」시설이 새로 마련된것은 축구발전에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나라에 근대 축구경기가 들어온것은 63년전. 이미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의 축구와 비슷한 유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소의 오줌통 또는 피대에 털이나 바람을넣어 축국, 농주, 기구등의 이름으로 성행되었다. 물론 이런 구희는 오늘의 축구와 같이 과학적인 이론은 없었으나 유희성을 띤「스포츠」로 성행되었음은 삼국사기등에서 얼마든지볼수있다.」
오늘의 축구가 어떻게 수입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없는데 1905년 외국어학교의 우리 학생들이「볼」을 찬것이 우리 축구의 효시.

<기진해 백기 들때까지>
그후 1906년3월 궁내부 예식원주사인 현양운등 3O명이 대한체육구락부라는것을 두었으니 이것이 곧 완전히조직된 최초의 축구「팀」. 첫공식경기로는 동소문밖 봉국사에서열린 법어(불어)학교운동회의 정식종목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다. 당시 축구는 경구 탕구 척구등으로 불렸는데 경기가 재미있고 용감하며 돈이 적게든다는 점에서 국민들에게 급속히 전파, 급기야는 우리의 국기로 발전해갔다.
그러나 그때의 운동장이란 협소했고 선수는 상투에 망건을쓰고 짚신에 조끼를입은 한복차림. 한「팀」의 인원수는 상대방과 같은수이면 무방했고 「골·포스트」는없이 「골·키퍼」의 신장을 기준삼았다. 경기시간은 제한이없어 어느「팀」이든지 기진하여 백기를 들면 끝냈던것이며 만일 득점이없을때는 벌칙수에따라 승부를 가렸다.
또한 기술이란 찾아볼수없었고 강력한 체질에다 인내성, 주력만이 필요했으며「들어뽕」이라는 말처럼「볼」을 하늘 높이 솟치고 멀리만 차면 당대일류의 선수로 손꼽혔다.

<파벌싸움에 선수 나태>
이렇게 발전, 보급된 축구는 일제의 탄압에 반발하는 민족항쟁의 수단이되어 평양·함흥·서울·진주등을 중심으로 요원의 불꽃처럼「붐」을 일으켰다. 유명한 경평전이나 연보전이 축구로 방방곡곡을 흥분시킨것도 이즈음.
해방후도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은 우리 축구는 국내에서뿐아니라「아시아」전역에서도「축구한국」의 이름을 날렸다. 「아시아」선수권대회 1, 2회대회의 연승과「메르데카」배쟁탈대회, 청소년대회의 연승은 그대표적인 예.
그러나「아시아」의 정상을 자랑하는 이 황금시대도 61년을 깃점으로 기울었다. 지도자들의 해외원정을 둘러싼 파벌싸움, 선수들의 나태가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각국의 급속한 발전이 우리의 축구를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따라서「힘」에만 의존했던 우리의 축구는 한날 신화로 남게될 현실에서 발버둥치고 있는것이다.

<세계 백29개국서 성행>
현재 국제축구연맹(FLFA)의 가맹국수는 1백29개국. 「유엔」의 가맹국수보다 5개국이나 더 많다. 그만큼 축구는 세계 어느 구석구석에서도 성행하고 있는 세기의 총아. 60년「로마·올림픽」때 입장수입의 3분의2가 축구에서 나왔고, 66년「런던」의 세계선수권대회때의 수입이 10억원이 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
7O년 세계선수권대회는「멕시코」에서 열리는데 예상수입은 자그마치 15억원. 축구가 인기를 끄는 것은 「스피드」와「드릴」에 있음은 말할것도 없다.
그래서 축구를 외면하던 미국도 작년부터는 1백만「달러」로 각국선수들을「스카우트」,「프로」축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는 21개「팀」이 4개조로 나뉘어「리그」를 벌이고 있는데 차츰 관중수가 늘고있어 7O년에는 야구를 육박하리라는 전망.

<선천적인 훌륭한 체질>
한편 일본만해도 64년의 동경「올림픽」을 계기로 기술의 향상과 아울러 매년 축구관중은 상상외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와는 작년10월「멕시코·올림픽」예선전에서 싸워 3-3으로 비겼지만 이런 상태로 나가다가는 언제 일본에 눌릴는지모른다.
그리고 남미와「유럽」서는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도 유명선수의 이름은 다알고있을정도로 축구열이 대단하다. 관중들 끼리의 난투극, 복권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됐다는 짤막한 외신은 축구인기의 단면을 표시하는 좋은예.
우리의 축구가「힘」에의 탈피를 못해 저미하고있음은 누구나 알수있다. 그것은 최근의 해외원정의성과가 쉽게 알려준다. 그러나 작년부터 단행된 선수의 신진대사와 서독「코치」의 초빙으로 동면에서 깨어난것도 숨길수없는 사실-. 축구에있어 우리는 선천적으로 유리한 체질을 갖고있다. 그대상이「아시아」에 국한된다고 할수있지만「런던」의 세계선수권대회 때 북괴가 결승「토너먼트」까지 오른것을봐서는 동양인의 체질이 세계정상을 극복하는데 결정적인「핸디캡」이 될수는 없다.

<헌신적 지도자 아쉬워>
문제는 기술향상, 시설완비, 지도자의 자질향상인데 시설은「나이터」하나만이라도 갖게 되었으니 남은 숙제는 선수들의 기술향상에 직접 영향을 주는 지도자의 자질 향상. 좀더 젊고 유능한 지도자가 나와 선수들과 함께「단결」과「연구」를 내세우고 축구의 운명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또한 정부는 시설과 해외원정등 뒷바라지에 인색하지 않을때「축구한국」의「이미지」는 되살아나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갈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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